종교

[성경 대탐구] <제2편> 정경화 작업

스카이7 2018. 2. 18. 13:46

[성경 대탐구] <제2편> 정경화 작업 


구약성서, 언제 어떻게 정경화 됐나

 

구약성서는 1000년에 가까운 긴 역사 속에서 기록돼 왔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좀더 엄밀하게 말하면 정경화 작업은 기록의 역사와 거의 맥을 같이 한다고 해도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구약성서 원본 즉 히브리 성서는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 등으로 구분된다. 이런 형태를 장르별 구분이라 한다. 율법서를 히브리어로 토라라고 부르는데 이는 '사활적' 의미를 담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그야말로 삶과 죽음이 수시로 교차되는 절박한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사는 일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길이었다. 사활적이란 바로 이런 의미다.

 

율법서의 장르에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 5개의 책이 속해 있으며 후일 신학자들은 저자의 이름을 따서 '모세 5경'이라 불렀다. 율법서가 정경화된 시기는 주전 5세기로 보여진다.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은 주전 458년 에스라 선지자의 인솔로 2차 귀환길에 오른다. 바로 이 시기에 에스라의 주도로 정경화가 진행된 것이다.

 

에스라 주도의 정경화 배경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에스라 이전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접근이 요구된다. 주전 930년경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고 그후 200여년후인 722년경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한다. 그나마 남은 남유다도 주전 606년경에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혼미를 거듭한 후 20년이 흐른 586년경에 함락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 때 법궤도 분실되고 만다.

 

법궤의 분실은 이스라엘 공동체에는 그야말로 기댈 기둥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법궤의 분실은 성서 원본 혹은 필사본의 분실을 의미한다. 그것도 통째로 잃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포박돼 잡혀가 적게는 50년에서 많게는 140여년동안 더부살이보다 더 견디기 힘든 포로생활을 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정경화 작업은 생과 사를 가름하는 사활적 발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놓지지 않아야 할 질문이 있다. '원본과 필사본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상태에서 어떻게 그것을 복원할 수 있었을까?' 정경화에 박차를 가했던 에스라는 포로였던 자기 백성을 이끌고 왔을 때 이미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스 7:6)였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율법을 모두 암송했으며 그것을 다른 언어로도 통역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의 말씀을 보전한 것이다. 보통 히브리어 성서 시대를 에스라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 이유는 이런 역사적인 맥락 때문이다.

 

물론 율법서의 정경화 시기는 이보다 훨씬 앞서 전개된 흔적도 종종 눈에 띈다. 주전 621년 요시야의 종교개혁의 동기로 신명기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때 신명기에는 벌써 율법책(신 29:21, 30:9∼10)이 등장한다.

 

히브리 성서 두 번째 부분인 예언서의 정경화 시기를 주전 3세기 이전으로 보고 있다. 예언서는 전기 예언서(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와 후기 예언서(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소선지서)로 나뉜다.

 

유대교 경전의 세 번째 부분인 성문서의 정경화는 가장 마지막에 이뤄졌다. 성문서에는 시가(시편, 잠언, 욥기)와 오축(아가, 룻기, 애가, 에스더서, 전도서) 역사(다니엘서,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서) 등 12권의 책이 포함돼 있다. 가장 많이 거슬러 올라가면 주전 2세기 후반부터 정경화를 위해 성문서의 결집이 시작된 것으로 파악된다. 기독교 경전에서 한발짝 벗어나 있는 외경의 집회서에 따르면 성문서의 정경화에 대한 추론의 근거를 포착할 수 있다. "시락이라는 사람의 손자가…율법과 예언서와 우리 조상의 다른 책들을 읽는 데 헌신했다"

 

여기서 율법, 예언서에 이어 '다른 책들'이란 매우 포괄적 의미를 담고 있으나 히브리어 성서의 순서로 볼 때 이것이 성문서일 것으로 판단된다. 집회서가 쓰여진 시기는 주전 2세기 후반이다.

 

이것이 신약성서로 넘어오면 그 해석은 더욱 분명해진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

 

여기서도 율법과 선지자의 글(예언서)에 이어 나중에 등장하는 시편은 분명히 성문서에 속한다. 누가복음의 기록연대를 주후 1세기 후반으로 볼 때 성문서는 이 시기에 유대인들에 의해 이미 애독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렇듯 구약성서의 정경화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때로는 '요동치는 개혁'에 의해, 때로는 유수처럼 '자연스런 과정'에 의해, 때로는 아직은 알 수 없는 '막막한 과정'에 의해 이뤄졌다. 그렇지만 성문서가 정경화됐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는 주후 1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사실상 정경화는 깔끔하게 매듭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화룡점정(畵龍點睛)과 같은 사건이 유대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후 70년 로마인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 사건이 그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뜻과는 관계없이 흩어졌고 피신처를 찾아 나섰다. 그러면서 그들은 바벨론 패망을 떠올리며 그때처럼 다시 뿔뿔이 흩어져 버릴 것을 염려해 신앙이란 끈으로 백성들을 결집시키고자 했다. 가장 안전한 곳이 웃시야가 차지했던 성읍 중 하나였던 얌니아였다. 그곳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정경화에 대한 필요성을 체득했다. 멸망 후 20년이 지난 주후 90년 유대인들은 얌니야에서 총회를 개최했다. 율법서와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도 총회에서 정경으로 낙착됐다. 비유대인들은 이 엄청난 총회를 그저 '얌니야 회의'라 불렀다.

 

 주전 5세기 에스라 주도로 율법서 진행

 

고대 함족의 영웅 니므롯은 바벨탑을,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중국인들은 만리장성을 쌓고 있을 때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성서를 쓰고 남겼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첫번째 이야기들은 고대 수메르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모태에서 형성됐다. 두 문명은 여러 신들의 협의에 의해 우주와 역사가 관장된다고 믿었다. 구약성서는 이런 다신교적 문명의 한 복판에서 유일신·절대자 하나님을 경험한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남겨진 간증록이다.

 

이들은 전쟁의 패배, 이방 민족에 의한 노예화, 공동체 자체의 내분과 갈등, 그리고 혹독한 생존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붙들고 살아가야 할 의미를 모색하면서 고군분투한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런 참혹한 환경 속에서 생존에 대한 궁극적 질문을 던지고 또 던졌다. "이 땅에 존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죄와 벌의 악순환, 자기파괴적 무질서와 혼돈이 아닌 사랑과 정의로 가득찬 인격적 하나님이 존재하고 있음을 체험했다. 그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주재자이시며 왕이심을 확신하게 됐다. 그래서 인류 공동체를 위해 그 어떤 문명의 유산 대신 성서를 남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는 자신의 존재 이유와 소명을 추구하려는 개인이나 공동체에게는 영감 어린 희망의 책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옹호하시며 편드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 부분에서 성서 비평학적, 성서 신학적 견해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이스라엘은 셈족으로서 생물학적 인종의 공동체나 세계사의 흐름에 한 지평을 연 특정 국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대한 악과 혼돈의 세력에 항거해 생존 그 자체를 위협받고 있는 개인이나 집단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라는 것임을 학자들은 누누이 강조한다.

 

구약성서는 분명히 이스라엘이란 특정 민족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으며 그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가고 있지만 사실은 보편자에 대해, 보편적 가치와 진실에 대해, 그래서 특정 민족에 대한 구원이 아닌 인류의 구원을 말하는 책이다.

 

신약성서로 눈을 돌리면 이 설명은 절대적 지지를 받는다. 신약성서는 하나님의 배타적 사랑과 구원 이야기가 어떻게 인류에 대한 보편적 이야기로 전환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결국 이스라엘의 특수한 구원의 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가치와 어떻게 접목되는지에 대한 과정을 증언하는 것이 신약성서라 할 수 있다. 구약성서가 그토록 증거하고 전달하려고 힘썼던 진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그의 가르침 안에 집약돼 있기 때문이다.

 

성서 전체를 통시적·통전적으로 들여다보면 구약과 신약은 서로 고리처럼 연결돼 있고, 보충설명하고 있으며, 다소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되 대화하는 양상으로 편집돼 있다. 이를테면 모세의 엄숙주의와 다윗의 감성주의가 병렬돼 있고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와 포용적 관대함이 겹쳐 있다.

 

이 부분에 대해 김회권 숭실대 교수는 저서 '현대인과 성서'를 통해 "성서는 모순적이지만, 포용적이고 대화적"이라고 언급하면서 "이런 역설적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성서의 매력 중 하나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성서는 무조건 신봉되기 전에 자세히 분석되고 해석돼야 할 책이다.


공관복음 철저히 ‘인간 예수’에 초점

  

공관(共觀)복음이란 복음서 기자가 나사렛 예수를 똑같은 관점에서 바라본 복음서란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이 여기에 속한다. 이 복음서는 예수를 '때로는 철저하게' 인간이란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예수의 인성을 강조한 복음이다. 그래서 공관 복음은 서로 비교하면서 볼 수 있는 공통 자료가 많다. 이에 반해 4복음서 중 하나인 요한복음은 예수의 신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 때문에 요한복음은 공관 복음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공관 복음의 기자들은 예수의 3년간 공생애(public ministry)와 십자가 처형, 3일 후 부활, 그리고 부활 뒤 40일 만의 승천에 대해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기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자신의 의지를 꺾고 시험당하시는 예수의 인간다움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인간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는지에 대한 과정을 귀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최초로 쓰여진 마가복음=복음서 가운데 최초로 쓰여진 것은 마가복음이다. 나머지 공관 복음인 마태와 누가복음은 마가복음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복음서를 연구하는 성서비평학자들은 먼저 마가복음에 눈을 돌리곤 한다. 마가복음의 기자는 나사렛 예수가 말구유에서 태어난 사건도, 수태고지로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사실에도 그렇게 심각하게 주목하지 않는다. 이런 사건들은 예수의 신성을 논하기엔 덜 적절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대중의 눈에 포착된 인간 예수에 주목한다.

 

예컨대 예수가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들렸던 그 음성이 과연 하나님의 음성인지 마귀의 음성인지를 분별하는 장면과 나아가 '자신이 누구인가?'를 연거푸 묻는 상황을 마가복음의 기자는 비중있게 서술하고 있다.

 

광야에서 돌아와 "하나님 나라가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언한 그 시점부터 예수의 삶은 공생애로 접어든다. 공생애란 예수의 개인적인 생활과 반대되는 개념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수는 공생애 3년의 기간 동안 갈릴리 일대를 누비면서 성서를 가르치고 병자를 치유하고 악귀 들린 자를 해방시켰다. 그리고 새벽에는 깊이 기도하고 낮에는 가르치면서 주변에 모여든 제자들과 어울리는 데 시간을 보냈다. 대중의 혼을 깨운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공생애에 대한 소문은 갈릴리 일대를 순식간에 넘어 예루살렘과 유대, 사마리아와 헬라 지역, 시리아 지역까지 퍼져나갔다. 당시 예루살렘은 잘못된 신관과 거짓 종교의 본산지나 다름없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30여㎞ 떨어진 가이사랴 빌립보는 팔레스타인을 지배했던 로마 총독의 지휘부가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빌립보는 잘못된 신관이 자리잡고 있던 유대 종교의 뇌관이었다. 갈릴리에서 지지기반을 확충한 예수는 12제자를 이끌고 바로 가이사랴 빌립보까지 북상한 것이다.

 

그 현장에서 예수는 공생애 전반기 사역을 마무리하고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막 8:27)

 

구름처럼 따라다녔던 대중은 예수를 예언자라고 생각했다. 마치 비운의 생애를 걸었던 예레미야, 엘리야, 세례 요한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홀연히 나타나 질풍노도와 같이 하나님 나라 운동을 벌이던 목수 출신, '방랑의 전도자'가 대중들의 눈에 비친 초기 예수의 초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 한 사람은 예외였다. 제자 베드로의 고백은 그야말로 우주 저 끝을 관통하고도 남을 만한 영적 직관력을 보여줬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

 

자신의 정체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도를 테스트한 뒤 예수는 아주 위험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한다. 마가복음의 기자는 이 순간을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보고 있다. 당시 상황은 예수의 영적 권능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대중의 열기와 지지는 현실 정치의 기대로 이어졌다. 그 결과 예수는 유대 당국과 로마 제국에게 가장 위험하고 불온한 인물로 지목된다.

 

엄청난 군중을 움직일 수 있는 권능과 카리스마를 발휘한 예수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열정 때문에 당국자들의 중추인 예루살렘 성전을 혁파하고자 한다. 당시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봉사돼야 할 성전이 종교 지도자들의 권력 아지트로 전락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을 택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유월절은 유대 민족의 해방절이다. 급기야 예수는 로마 제국에 항거한 정치적 음모자요 유대인의 왕으로 참칭하는 불온한 혁명아로 누명이 씌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한다.

 

여기서부터 성서를 읽는 독자들은 긴장해야 한다. 마가복음을 포함, 공관 복음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비겁하기 짝이 없었던 제자들은 용사가 돼 다시 뭉쳤고 전 세계로 파송되는 능력을 발휘한다.

 

무엇이 그들을 급진적인 변화로 몰고 갔을까? 지금까지 수많은 심리학자들은 이런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설들을 쏟아냈다. 그럼에도 그 어떤 가설도 마가복음의 단순한 설명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다. 마가복음의 기자는 제자들의 급진적 변화에 대해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봤기 때문"이라고 정곡을 찌르고 있다.

 

◇예수의 죽음 이후=예수의 죽음은 어쩌면 만인의 눈앞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의 부활은 오직 제자들에게만 보여진 사건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반증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는 부활 후 40일 동안이나 지상에서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친 뒤 승천하셨다. 승천 후 10일은 오순절이다. 바로 이 오순절에 예수가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다.

 

나사렛 예수가 외친 하나님 나라는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더욱 선명하게 역사 속에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 나라를 세계 속에 확산시키는 통로였다. 구약성서에서 단편적이고 간헐적으로 실체화됐던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구체화된 것이다.

 

◇정경화 된 신약성서=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담고 있는 신약 성서가 정경화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2세기가 마감되던 시기까지 초대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했던 기독교의 정경은 구약 성서뿐이었다. 2세기 중반, 파피아스와 폴리캅 시대에 이단자 마르시온의 도전으로 신약 성서의 정경화는 불가피해진다. 363년 역사상 최초로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기독교 정경 채택을 위한 회의가 열렸고, 367년 드디어 27권의 신약 성서가 채택되기에 이른다.

 

[ 신약 정경 기준 ] 

 

신·구약 성서 66권을 기독교의 정경(正經)이라 부른다. 정경으로 자리매김할 때까지는 구약의 경우 500년 이상의 세월이, 신약은 100년 이상 걸렸다. 이렇게 긴 세월이 요구됐다는 것은 정경으로 확정될 때까지 그만큼 우여곡절도 많았다는 의미다. 짧은 시간에 정경으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통상 '정경화'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경화 작업에서 그 기준은 참으로 엄격하다. 신약의 경우 가장 중요하게 꼽는 첫번째는 사도성이다. 메시아 예수는 12사도를 선택하고 자신의 권한을 그들에게 위임했다. 예수의 권위를 위임받은 사도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들이 쓴 것은 예수가 직접 쓴 것이나 같은 권위를 지니고 있다. 사도 외 다른 사람이 쓴 것은 예수의 권위가 부여될 수 없다. 그래서 신약성서는 예수의 책이자 하나님의 말씀이고 사도들이 기록한 책이다.

 

두번째는 정통성이다. 이는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신앙의 정통성을 말한다. 이 정통성을 담은 자료나 문서만이 정경화된 것이다. 성서가 정경화되기 전 개인이나 공동체는 분명히 여러 형태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통성에서 벗어난 신앙을 담은 그 어떤 사본도 정경화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다.

 

세번째는 보편성이다. 당시 문서를 교회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느냐를 따졌다. 특정 교회만 사용하는 사본들은 정경화되지 못했다.

 

신약성서 역시 사도들이 기록한 '자필 원본'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 사본을 참고로 원본을 재건했다. 그 사본은 그리스어 사본, 고대 번역본, 교부들의 저서 3가지 사료가 주를 이룬다.


영지주의자 도전 계기 2∼3세기 걸쳐 27권 채택

 

신약성서 가운데 복음서가 맨 앞에 등장하지만 가장 먼저 저작되고 교회에 유포·회람된 책은 바울 서신이다. 신약성서 27권 중 바울 서신이 기록된 시기는 48년부터 58년 사이로 성서비평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마가복음이 60∼70년경, 마태복음 70∼80년경,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80∼90년경, 그리고 요한복음이 90∼100년경에 씌어졌다. 따라서 바울 서신은 복음서보다 대략 20년 내지 10년 앞서 교회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주로 이방인들이 주축이 된 교회들 사이에 회람된 바울서신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강조하는 선교 신학이다. 이는 믿지 않는 자들을 교회에 입문시키는 기초 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바울 신학은 바울 자신도 시인했듯이, 유대인 출신 사도들이 보기에는 행위를 강조하는 측면이 부족하다는 비판(롬 3:1∼8)을 촉발시키기도 했다.

 

◇예수 모방신학 복음서=이런 바울 서신보다 대략 20년 늦게 저작된 복음서들은 바울이 강조한 논지는 살리되 바울 신학이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 여파를 차단하는 이른바 '예수 모방 신학'을 제시하고 있다. 복음서들은 구약성서에서 단편적이고 간헐적으로 실체화됐던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 반면 바울 서신은 임박한 재림 신앙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참여를 통한 자아갱신과 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때문에 개인적·실존적 의미의 구원을 설명하는 데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공동체·개인구원론 사도행전=복음서에 나타난 공동체적 하나님 나라와 바울 서신에서 강조되고 있는 개인 구원론 사이에는 나름대로 틈새가 벌어진 듯 보일 수 있다. 여기서 통전적 사고에서 멀어지면 번민의 늪으로 빠져들 수 있다. 바로 이 틈새를 연결짓는 고리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속편으로서 공동체와 개인 구원론을 아우르는 '인류를 위한 복음'을 내세우는 사도들의 발자취다.

 

그런데 정작 예수께서는 단 한 편의 글도 남기지 않으셨다. 신약성서가 문서화된 것은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 승천해 제자들의 곁에서 그 모습을 감춘 이후 길게는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이 공백의 세월 동안 물론 부분적인 문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수의 메시지는 구전 전승에 의해 보존돼 왔다. 구전 전승의 대열에는 누구나 참여했던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예수의 메시지를 전파할 의무를 부여받은 제자들로 국한됐기 때문이다.

 

구전 전승과 제자들의 문서화 과정을 거쳐 정경화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사실 2세기가 마감되던 시기까지 초대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됐던 기독교 경전은 구약성서뿐이었다. 당시에는 각 지역 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의 신앙과 경건에 유익이 된다고 판단되는 문서들을 추천했다. 이렇게 선택된 문서들은 교회 지도자들의 사견에 의한 것들도 포함돼 있었다. 많은 문서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지기 시작했고 추천된 것들도 점차 늘어났다.

 

◇이단·영지주의자의 활동=이 과정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2세기 중반 초대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이단인 영지주의자가 활개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초대교회보다 먼저 자신들의 사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복음서의 일부 내용을 이용했다. 산상수훈의 내용과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등을 영지주의적 시각으로 해석하면서 이를 교회에 유포시켰다. 영지주의자들의 문서들은 교회 안에서 아무런 제약없이 무차별 유통됐다.

 

이단들의 이런 극열한 활동은 신앙의 표준이 될 수 있는,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나 통일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텍스트의 선정에 대한 필요성을 가져다 준 계기가 됐다. 때를 같이해 영지주의자의 리더격인 마르시온의 도전은 정경화를 서둘러야 할 원인까지 제공했다. 마르시온은 구약과 관련된 모든 문서를 배격하고 심지어 마태·마가·요한 복음까지도 제외시키면서 오직 바울 서신에 매료돼 사도행전으로 책을 만들어 '정경'이라 주장했다.

 

그는 마태·마가·요한 복음은 구약적인 색채가 짙다고 해서 정경에서 제외시켰고, 대신 누가복음은 바울과 연관이 있다고 판단, 정경에 포함시켰다. 그러면서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구약성서의 인용문들은 모두 삭제해 버리는 등 '사사로운 수정'을 가했던 것이다. 이렇게 수정을 가한 마르시온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바울의 10개 서신 그리고 자신의 저서인 '대구(對句)'를 정경에 포함시켜 교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의 저서 '대구'는 구약성서와 상반되는 구절들을 대립시켜 열거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마르시온의 도전에 교회는 정경화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해야 했다. 이단자 마르시온이 먼저 일부 성서를 정경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초대교회에는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 따라서 2∼3세기 동안 이단의 도전을 받으면서 서서히 경전의 모습을 갖춰 갔던 초대교회는 4세기에 이르러 신약성서의 정경화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신약성서 정경화 낙착=역사상 최초로 정경 채택을 위한 회의는 363년 소아시아 프리지아의 수도 라오디게아에서 열렸다. 여기서 예루살렘의 감독이었던 키릴의 주도로 요한계시록을 뺀 지금의 신약성서 26권이 정경으로 결정됐다. 그리고 4년 후 367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신약성서 27권이 맨 처음 정경으로 채택됐다. 아타나시우스는 그해 기독교 절기에 대한 정확한 날짜를 이집트 교회에 통보하고자 편지를 발송했는데, 바로 그 편지에서 요한계시록을 포함한 지금의 신약성서 27권을 정경으로 공식 인정한 것이다. 그후로도 신약성서 27권에 대한 정경 확인은 393년 북아프리카 히포 공의회, 397년과 419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회의 등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에서도 신약성서 27권은 변함없이 그대로 인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영지주의란 ]

 

영지주의란 영지(靈知·gnosis)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 종교운동을 말한다. 여기서 영지는 지식을 말하지만, 일반적인 지식이 아니라 영혼의 근원, 하나님의 본질, 우주와 세계가 생성된 원인 등 근원에 접근하는 데 필요한 앎을 뜻한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디에 있었고, 어떻게 여기에 왔으며, 어떻게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영지주의자들의 교리에 따르면 신은 물질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었으며, 악은 물질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육체가 악하다고 믿었던 것도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하신 신은 모든 물질적인 것과 무관하신 분이라고 믿었다. 결국 악한 물질(세계)을 창조한 창조신도 악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적대시한 것이다.

 

이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하나님을 예수가 계시한 신약의 하나님과 구별하고 배격했다. 그러면서 "신은 선하신 분인데 도대체 영적 세계에서 무엇이 잘못됐기에 신의 소산인 인간이 악하게 됐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그들의 관심사는 철학이 아닌 구원이었다. 즉 어떻게 인간이 다시 신과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으며 순수한 영의 세계로 복귀할 수 있을까에 대해 사상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문제는 영지주의자들이 그 원인을 인간에게서 찾지 않고 창조의 모순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인간 영혼의 본질을 하나님의 신성과 동일시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이것을 깨달으면 하나님과 같은 본질을 회복한다고 믿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신성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지주의는 불교와 본질적으로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영지주의가 정통 기독교로부터 탄압을 받았고 이단으로 정죄된 이유 중 하나였다.

 

이들의 관심은 구원에 쏠려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은 그들이 구축한 사상에서도 중요한 축을 이루게 됐다.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요소들과 동양과 헬라 사상이 혼합된 일종의 혼합주의 종교 형태를 띠었다. 영지주의는 예수시대부터 광범위하게 퍼졌다가 2세기 중반에는 신비주의와 연결돼 번창하면서 2세기 후반에는 절정에 달했다. 그후 기독교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되면서 쇠퇴일로로 치달았다.

 

그렇지만 영지주의는 중세를 거쳐 근세에까지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명맥의 배경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1945년 이집트 남부 나그 함마디에서 한 농부에 의해 붉은색 큰 항아리가 발견됐다. 당시 항아리에는 영지주의 문서가 대량으로 담겨 있었는데, 이것이 영지주의 복음서라 할 수 있는 '도마복음'이다. 서구에서는 이 문서의 발견 이후 영지주의를 기독교의 종파 중 하나로 평가하기도 했다. 모두 13권으로 된 다량의 파피루스는 발견된 지 35년 만인 지난 1980년 영인본으로 출판됐다. 제목은 '나그 함마디 문서'. 


정경 확정 이전 초기 문서들 형식·내용 다양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은 신약성서 정경이 예수가 죽은 뒤 어느날, 그것도 갑자기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한참 잘못된 생각이다. 신약성서가 정경으로 확정되기 이전,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 유포·회람됐던 문서들은 매우 다양하다. 이들 문서는 100년 이상 동안 정경화를 위한 치열한 논쟁을 거쳐 신약성서 27권에 포함됐다. 이런 의미에서 초기 기독교 문서들을 살펴보는 일은 '잃어버린 원문' 혹은 '신약성서의 기원'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초기 기독교 문서(서신)=정경 이전 초기 문서들로서 대표적인 것은 기독교 서신(편지)을 꼽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 최초의 서신 발송자였다. 그는 지중해 동쪽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교회를 세웠다. 바울이 선교 대상으로 삼았던 이교도들은 로마 제국에 살면서 다신교를 믿었던 사람들이다. 바울은 한 지역에 공동체를 세운 후 다른 지역으로 옮겨 다니면서도 지속적으로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 때로는 좋은 소식도 들려왔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바울이 세운 공동체의 멤버들 가운데 일부는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었는데, 이들은 바울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상반된 내용을 전하곤 했다. '정통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이단이 있다'는 역사신학적 해석은 비단 오늘의 일만은 아니었다. 바울은 이런 이단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써 단호한 의지를 담은 편지를 공동체에 보낸 것이다.

 

◇바울의 첫번째 편지=데살로니가 전서는 바울의 첫번째 편지이다. 이 편지는 주후 49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기는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지 불과 15년 후이며, 그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가 이 땅에 출현하기 약 20년 전이다. 바울은 그 편지를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주라"(살전 5:26∼27)

 

바울은 이 편지를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든 교인에게 읽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민경식 박사는 저서 '성경 왜곡의 역사'에서 "이 말 속에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이 바울의 편지를 권위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속뜻이 담겨 있다"고 평가했다. 주목할 부분은 바울은 '성서를 집필하기 위한' 생각을 가지고 그들에게 편지를 쓴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신구약 성서의 기록에 동참했던 거의 모든 기자들에게 적용되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바울의 편지는 처음부터 여러 공동체나 교회에서 앞다퉈 회람되곤 했다. 이 편지는 여러 장소에 흩어져 있던 각각의 교회를 하나로 묶는 구심점 역할을 했으며 그들의 신앙과 예배의식을 통일시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발생하는 이단 문제를 비롯, 제사 문제 등 다양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기에 교인들은 모일 때마다 그 편지를 큰 소리로 낭독한 것이다.

마침내 바울의 편지 중 많은 편지는 성서의 권위를 획득하게 됐다.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13편의 편지가 신약성서에 포함된 것이다. 신약성서에는 꽤 많은 편지들이 포함돼 있다. 공동체, 예를 들면 고린도인들이나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들이 그것이다. 또한 빌레몬 개인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도 있다.

 

바울의 경우 신약성서에 포함돼 있는 편지들보다 훨씬 더 많은 편지들을 썼을 것으로 민 박사는 '성경 왜곡의 역사'에서 주장하고 있다. 민 박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대목이 성서에 등장한다. 지금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편지들을 바울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린도전서 5장 9절에서 바울은 '이전에'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는 고린도전서를 쓰기에 앞서 보내진 편지를 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 교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바울에게 보낸 편지(고전 7:1)와 바울의 적대자들이 보낸 편지(고후 3:1)도 있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 문서로서 복음서들=사실 신약성서 27권의 책이 정경으로 확정되기 전, 초기 기독교인들이 만들고 유포하고 읽고 따랐던 문학 양식은 편지 말고도 다양하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그때 기독교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곁을 떠난 예수를 '주'라 부르면서 그의 생애와 교훈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 부활 등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했다. 이런 내용을 담은 다양한 복음서들이 등장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현상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빌립이 썼다고 하는 빌립 복음서, 예수의 동생 유다 도마가 기록했다고 전해지는 도마 복음서, 일종의 여성 추종자였던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가 그것들이다. 특히 이런 복음서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유다복음도 당시 영지주의자들에게는 압도적인 지지와 인기를 누렸다. 유다복음에 따르면 가롯 유다의 예수 배반이 사실 인류 구원이라는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 예수와 유다가 모의한 것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예수의 어록집 Q자료=그런데 이런 복음서들은 정경으로 낙착된 4복음서의 기자들에 의해 어떤 형태로든 참고 자료가 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의 기자는 이전에 '많은' 자료들을 참고해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엮었다(눅 1:1∼2). 물론 누가복음의 기자가 참고한 자료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학자들은 이 자료를 'Q자료'라 부른다. Q자료는 주로 예수의 말씀을 기록한 일종의 '어록집'이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두 기자는 이 자료를 활용, 자신의 복음서에 편집해 실었다.

 

그런데 이런 자료들의 원본은 왜 단 한 편도 남아 있지 않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한 곳도 아닌 여러 공동체, 그것도 여러 교인들로부터 회람되면서 닳고 닳아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 사본마저도 극히 일부만 남아있을 뿐이다. 초기 기독교 문서들은 정경화의 대열에서 생명의 움을 틔우기 위해 회람·배포되고 있었다.

 

[ Q자료란 ]

 

Q자료란 예수의 공생애 기간의 어록을 모아놓은 자료를 말한다.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는 서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법이나 사용하는 단어, 등장하는 인물과 이름이 상당히 일치한다. 공관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책은 마가복음이다. 마태와 누가복음의 기자는 마가복음을 참고해서 편집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마태와 누가복음은 일종의 마가복음의 확장판이다. 이 때문에 공관복음 중에서 마가복음이 가장 짧게 서술돼 있다.

 

그런데 공관복음에서 공통 부분을 제외하고 남은 내용들 가운데서 다시 마태와 누가복음에서 공통적인 자료를 빼고 남은 구절들이 발견된다. 이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자가 마가복음을 제외한 다른 자료도 가지고 편집했을 것이란 확실성을 높여주는 대목이다.

 

이 자료의 사본은 비록 발견되지 않았지만 비평학자들은 '자료'라는 독일어의 첫글자 Q자를 따와 Q자료라 부른다. 그래서 Q자료는 성격상 예수의 어록집이나 마찬가지다. 주기도문이나 팔복에 대한 가르침이 여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공관복음서는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마태 및 누가복음의 기자가 사용한 Q자료 그리고 그들이 참고한 별도의 자료로 이뤄졌다는 것이 비평학자들의 견해다. Q자료는 다수 학자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 점에서 구약성서의 문서설과는 다소 대비된다 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인에 사도행전 큰 영향

 

AD 610년 지금의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지방 근처에 위치한 이즈라 산 계곡의 동굴에서 쿠라이시족 부족 출신인 모하메드가 환상을 보았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그에게 명했다. "낭송하라!" 모하메드는 알라의 말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고 코란의 첫 구절을 받게 됐다. 암송된 말씀이 기록된 책이 다름아닌 코란이다. 코란이란 '낭송'의 의미다.

 

1827년 9월22일 부활한 모로나이로부터 선지자 조지프 스미스가 모르몬경을 받았다. 모르몬경은 모르몬교도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4대 표준 경전(성경·모르몬경·교리와 성약·값진 진주) 중 하나다. 모르몬경은 고대 아메리카 대륙의 야렛 민족, 리하이 민족, 뮬렉 민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러 종교들의 경전은 주로 이렇게 하늘로부터 뚝 떨어져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특정인의 손에 들어왔다. 경전을 신비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데다 이런 일화에 익숙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 기독교인들조차 신약 성서 역시 예수가 생존시 자신의 사역과 가르침을 기록해 제자들에게 남겨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이는 참으로 '화려한 오해'가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의 정경 형성 과정은 길고도 복잡했다. 신약 성서의 정경화 과정은 무려 300년 이상의 세월동안 험난한 여정을 거쳤다.

 

◇초기 기독교문서로서 사도행전=정경화 작업이 험난했다는 것은 정경 채택 작업 전의 문서나 자료가 그만큼 다양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경화 작업이 마무리가 되기 이전,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서신과 복음서 외에 사도들의 행적을 담은 '사도행전'을 들 수 있다.

 

고구려가 영토 확장을 위해 요동지방으로 적극 진출을 꾀하고 있을 무렵, 1세기와 2세기에 기독교 공동체는 로마의 담벽을 넘어 성장을 거듭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생애뿐만 아니라 그를 추종했던 사도들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자신들이 믿는 종교를 더 많이 알고 싶어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사도들의 행적을 삶의 지표로 삼았다. 그들의 행적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삶의 가치를 부여했고, 기독교인들은 그 삶을 좇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사도들의 행적을 담은 글들은 다양해졌고 교회에 다량 유포·회람됐다.

 

그 가운데 사도행전은 결국 신약 성서 정경에 포함됐다. 그러나 정경에 들어오지 못한 '행전'도 다양했다. 바울행전, 베드로행전, 도마행전 등이 그것이다. 이런 행전들은 정경으로 낙착된 사도행전과는 달리 사도들 개인에 대한 기록이었다. 지금은 아쉽게도 거의 제목만 남아 있을 뿐, 본문을 담고 있는 사본은 남아 있지 않거나 비록 남아 있는 경우라 해도 단편 사본에 불과하다.

 

◇초기 기독교 문서로서 묵시문학=이와함께 경정화 이전, 초기 기독교 문서들로서 계시록들을 빼놓을 수 없다. 다른 사도들과 더불어 바울은 예수가 하늘로부터 곧 재림해 세상을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울의 가르침대로 점점 다가오는 세상의 종말에 크게 매혹돼 있었다. 세상을 지배하는 악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왕국' 즉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김회권 교수는 저서 '현대인과 성서'에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를 수장으로 하는 왕국"이라고 명쾌하게 개념을 정리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 묵시문학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 가운데 마침내 하나는 신약 성서 정경에 포함됐다. 요한계시록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요한의 묵시문학서 외에 베드로계시록과 헤르마스의 목자 등 많은 묵시문학 작품들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널리 회람됐다. 묵시 문학 작품들은 거슬러 올라가 구약에도 등장했다. 구약의 다니엘서는 이와 맥을 같이는 유대교 묵시문학의 선례라 할 수 있다. 구약의 위경 가운데 '에녹1서'도 이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초기 기독교 문서로서 순교록=또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당한 박해의 실상과 순교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기독교 순교록이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이 '폴리캅의 순교'다. 폴리캅은 2세기 전반기에 살았던 인물로서 초기 기독교 순교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거의 반세기에 걸쳐 소아시아의 서머나교회 감독으로 활동했다. 폴리캅의 순교록에 따르면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다. 체포와 고통, 죽음이라는 가장 큰 위협이 닥쳤을 때 기독교인은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다.

 

◇정경화 기준으로서 사도성=그렇다면 초기 기독교 순교록들 중에서 이렇게 감동적인 폴리캅의 순교가 왜 신약 성서 정경에 포함되지 않았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정경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정경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도성이 있었야 한다. 사도성이란 구체적으로는 예수의 열 두 제자로 국한된다. 예수를 직접 따라다녔던 12제자만이 예수의 공생애 3년에 대한 실상을 가장 사실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이들에게만 성서의 저작권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다. 이들만이 정통성을 가지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부여받을 수 있다.

 

한 사례로 사도행전에도 박해와 순교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 스데반의 처형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 사건은 예수의 직계 12제자 중 한 사람인 누가가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 내용이 사도행전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사도행전 또한 정경에 포함된 것이다.

 

1546년 14권 구약기록 외경으로 인정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쉴 새 없이 가톨릭 교회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오직 성경'이란 표어를 제창하면서 가톨릭 교회는 '기록된 말씀에 포함된 진리(신구약 66권)'에서 떠나 있다고 공격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달랐다. 성서를 따르되 교부들의 일치된 의견에 따라 교회에 의해 내려진 해석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슈를 가지고 가톨릭 교회는 1546년 트리엔트에서 공의회를 개최했다.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비록 정경이 지니고 있는 만큼의 진정성은 떨어지나 이집트에 있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성경으로 인정하는 책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외경이라 부르는 14권의 구약 기록들이 그것이다. 14권의 외경은 에스드라전후서, 토빗서, 유딧서, 에스더 후편, 솔로몬의 지혜서, 시락의 아들 예수의 지혜서, 바룩(예레미야의 편지), 세 청년의 노래, 수산나, 벨과 용, 마나시의 기도, 마카비전후서 등이다. 구약의 외경은 대부분 헬라어로 기록돼 있으며 연대도 구약과 신약의 중간 시대에 속한다.

 

이와 관련,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학자 총회에서 결정한 신앙고백 제1장 3절은 "외경은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 아니므로 정경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외경은 성경과 달리 교회 안에서 어떤 권위도 가지지 못하며 인정되거나 사용돼서는 안 된다"고 선을 분명히 긋고 있다.

 

정경과 외경에도 들어가지 못한 문서들이 수없이 많다. 그것들 중에 걸러진 것을 위경이라 한다. 위경은 초기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 안에서 생겨난 문서들이다. 따라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근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으나 정경이나 외경에는 속하지 않는 것들이다. 그 숫자는 상당히 많아 확정돼 있지는 않으나 최대 65권까지 헤아릴 수 있다.

 

위경은 문학적 성격에 따라 묵시 문학서, 유언 문학서, 구약 내용의 확대 또는 전설, 지혜나 철학 문헌, 기도 시 송시, 유대 헬레니즘의 저작 단편들 등으로 구분된다. 묵시 문학서에는 에녹 1, 2, 3서, 바룩 2,3서, 에스라 4서, 아담 묵시록, 아브라함 묵시록, 엘리야 묵시록, 에스라 묵시록, 에스겔 묵시록, 스바냐 묵시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