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성경 대탐구] <제1편> 사본의 탄생(구약)

스카이7 2018. 2. 18. 13:44

[성경 대탐구] <제1편> 사본의 탄생(구약) ① 


3400년전 원본의 흔적 사본속에 엿보여

 

- 성경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성경 원본은 지금부터 3400여년 전에 시작됐다고 한다. 하지만 원본은 오간 데 없고 원본을 베껴 적은 필사본만이 존재한다. 사본은 구약의 경우 사해 사본과 알렙포 코덱스, 레닌그라드 사본 등 전질로 된 것은 3개지만 신약은 무려 5000여개가 존재한다. 사본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발굴되고 있다. 궁금한 성경의 비밀을 밝혀가며 성경의 지혜를 찾아나가는 '성경대탐구'를 2008년 연중기획으로 마련했다. -

 

구약은 BC 1400년부터 BC 430년까지 무려 1000년에 걸쳐 '여호와의 입'인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됐다(출 7:1∼2,민 22:18, 신 18:18∼22). 신약은 4복음서가 AD 50∼70년, 요한 계시록이 AD 95∼96년에 완성됐기 때문에 짧게 잡으면 35년, 길게 보면 46년 동안에 걸쳐 씌어졌으나 요한계시록이 완성됐을 때까지를 통상 100여년으로 보고 있다. 구약이 완성되고 신·구약 중간기를 거쳐 신약이 완성되기까지 대략 1500년이 걸린 셈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완벽한 사본은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이다. 이는 BC 2세기부터 AD 1세기에 걸쳐 씌어졌다. 물론 사해 사본보다 앞서 기록된 것들도 없지 않다. BC 7∼6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예루살렘의 케텝힌놈 은(銀)두루마리 조각과 BC 2∼1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나시 파피루스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은두루마리 조각은 민수기 6장 24∼26절만, 나시 파피루스는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 6장의 일부(셰마)만 기록된 것으로서 이들은 원본을 재구성할 수 있는 기본적인 요소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다.

 

사해 사본에 이어 철저히 유대교 전통의 맥을 이어온 마소라 사본이 AD 895년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모세 벤 아셰르의 카이로 예언서를 시작으로 1482년 리스본 사본에 이르기까지 모두 7개의 사본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950년쯤에 기록된 영국박물관의 코덱스(Codex)는 현재 히브리대학에서 성서를 만들 때 참고하는 사본이다. 코덱스란 '편집된 혹은 제본된 책'을 말한다.

 

특히 마소라 사본 가운데 1008년에 필사된 레닌그라드 사본은 사본학적 측면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통째로 보존된 유일한 사본이기 때문이다. 레닌그라드 사본은 사해 사본이 생겨난 지 1100년이나 지난 시기에 필사된 것이지만 원문에 훨씬 더 가깝게 베껴졌다는 것이 사본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오래된 사본이 반드시 원본에 가깝게 필사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대표적인 사본이라 할 수 있다. 원본을 놓고 '베끼는 전통'이 얼마나 정확했느냐에 따라 사본의 진가가 달라진다는 게 사본학자들이 강조하는 부분이다. 따지고 보면 서양 인쇄술의 창시자인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1455년에 찍어낸 구텐베르크성경도 비록 인쇄본이지만 마소라 사본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리스본 사본보다 30년 가까이 앞선 것이다.

 

이런 사본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살펴보면 구약의 경우 원본과 가장 오래된 사해사본과의 사이에는 무려 1200여년이란 세월의 틈이 발생한다. 이 장구한 세월 동안에 어떻게 원본이 고스란히 사본으로 필사됐을까에 대해 많은 이들은 의구심을 갖고 있다. 이는 성서 내용 자체에 대한 번민이 아니다. '주석의 지식'이 아무리 깊다고 해도 성서가 어떻게 필사됐는지에 대한 문제를 꿰뚫어 보지 않는 한, '성서의 진정성'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원본이 존재했기 때문에 필사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현재 원본 자체는 없지만 '원본의 흔적'은 찾을 수 있다는 게 사본학자들의 주장이다. 오경 중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은 돌판에 새겨졌다(출 34:28, 신 4:13). 성서 기록의 재료로는 돌판뿐만 아니라 점토판과 철필(렘 17:13,겔 4:1),석판과 끌(렘 17:1, 출 24:12, 신 27:2∼3,수 8:31∼32), 목판과 끌(사 8:1,합 2:2), 질그릇과 펜(욥 2:8), 파피루스(계 5:1), 동물 가죽인 피지(겔 9:2∼3,렘 8:8) 등이 동원됐다.

 

이런 재료를 분석해 볼 때, 원본 초기에는 돌판이나 점토에 기록했다가 이를 보관하기 힘들어 점차 파피루스쪽으로 옮긴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돌판에 새긴 증거로 김진섭(백석대 고대근동학) 교수는 저서 '구약 사본학의 원리'에서 아람어로 쓴 텔단 비문과 작카르 비문 등을 제시하고 있다. 텔단 비문은 BC 9세기에 다윗 왕가를 처음으로 언급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작카르 비문은 BC 8세기 초 하마스 왕 작카르가 이루워 신에게 헌사한 돌기둥 비문이다. 내용은 시편의 감사기도와 유사하다. 비록 모두 비성서적 내용을 담고 있지만 원본 초기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다만 성서 저자로 등장하는 선지자들이 직접 기록했는지, 아니면 구술에 의해 대필했는지, 만약 직접 기록했다면 어느 부분을 썼으며 대필의 영역은 어느 정도인지 등에 대한 구체적 사실은 밝힐 수 없다는 게 사본학자들의 중론이다. 예컨대 한글은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지만 한글 창제자로 통상 집현전 학자들이 아닌 세종대왕을 들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남병곤 선임기자 nambgon@kmib.co.kr

 

◇도움말 주신 분들 △김근주 교수(웨스터민스터 신학대) △김상근 교수(연세대) △김진섭 교수(백석대) △김회권 교수(숭실대) △민영진 박사(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신현우 교수(웨스터민스터 신학대)

 

[ 성서비평학이란 ]

 

진리 훼손아닌 올바른 성서 이해

 

성서비평학은 성서의 의미와 가치를 올바로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태동됐다. 성서 원본은 없고 사본만 있는데다 사본도 여러 종류가 있기 때문에 성서 기자가 기록한 본문의 의도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려는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흔히 ‘인간이 감히 성서를 어떻게 비평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얽매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성서비평학은 진리를 훼손하거나 그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성서 비평은 성서의 원문(본문), 구성, 특성, 역사 등을 한꺼번에 평가하는 작업이다. 이런 비평적 도전을 거치는 과정에서 비로소 성서가 권위 있고 영감 넘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더 명쾌해진다는 게 성서비평학자들의 견해다.

 

성서비평학은 대략 9가지 방법으로 이뤄진다.

 

그 첫번째가 본문 비평이다. 성서 본문의 형태를 회복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본문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많은 사본을 비교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 비평은 성서의 가장 원형적인 형태를 발굴하는 비평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자료 비평을 들 수 있다. 성서 본문은 기록자, 기록 연대, 기록 상황, 기록 목적 등을 가지고 있다. 이런 배경을 밝혀내는 것이 자료 비평이다. 특히 신학적 문학적 특징을 밝혀내는 작업은 중요한 테마다.

 

셋째, 양식 비평이다. 성서가 쓰인 시기의 삶의 양식을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양식 비평은 ‘삶의 자리’를 밝히는 연구라 할 수 있다. 시편이나 지혜서 연구에 매우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전승 비평이다. 본문이 어떤 과정을 통해 전승됐는지에 대한 작업을 하는 영역이다. 전승 과정에 개입한 단체, 지역, 요소, 동기 등을 분석해 전승 과정을 역추적하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통해 전승 비평은 양식 비평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다.

 

다섯째, 편집 비평이다. 본문 전승 과정에서 삽입된 편집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전승 비평에서 비교적 간과했던 편집자의 신학적 의도를 더 깊게 꿰뚫어 볼 수 있다.

 

여섯째, 경전 비평이다. 신앙공동체가 경전 안에서 경전을 통해 어떻게 유지됐는가에 대한 과정을 밝혀내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성서 본문의 경전 형태에 최종적 권위를 둔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일곱째, 사회학적 비평이다. 본문이 처한 당시 사회와 정치, 경제적 연관 관계를 통해 그 당시 사회 안에서의 신학적 의미를 발견하는 비평이다.

 

여덟째, 구조주의적 비평이다. 이는 성서에 등장한 설화나 본문의 내면적 구조를 명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으나 새로운 이념적 사조에 편승해 탄생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문학 비평이다. 수사학이나 비유법, 문체 등 일반 문학 비평의 방법론을 최대한 수용해 성서 본문의 진면모를 입체적으로 접근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이런 각각의 비평은 ‘절대적 승자’가 될 수 없고 ‘절대적 패자’도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비평 안에 거하지 않으시고 비평을 통해 우리에게 더 가깝게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 성서사본학이란 ]

 

사본이란 주로 손으로 성서원문인 모본(母本)을 베껴쓴 본문을 말한다. 그런데 모본을 베끼는 과정, 즉 필사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필사는 주로 한사람이 모본을 보고 읽어주면 여러 사람이 이를 듣고 받아 적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따라서 잘못 듣거나, 잘못 보거나, 읽어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등이 발생할 수 있다.

 

예컨대 히브리어 부정사 'lo'와 여격인 'lo(∼에게)'를 혼용하거나 후음인 헷(het)과 마찰음 카프(kaf)를 구별하지 못한 데서 발생한 아크(ah·형제)와 아크(akh·반드시)의 혼용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사본들 사이에 서로 차이가 생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본학이란 '최초의 완벽한 원본'이 가지고 있던 본문을 유추해 입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라진 원본을 재구성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사본학을 위해 성서 원문에 쓰인 히브리어나 아람어 헬라어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 언어의 방언에도 능통해야 하며 성서고고학, 성서지리학, 역사학 등의 지식이 요구된다. 그래서 신학의 영역 중에서도 사본학은 까다롭지만 신학의 백미로 꼽힌다.

 

[ 마소라(massora)란 ]

 

마소라는 '전통' 혹은 '말을 전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마사르(masar)에서 나왔다. 구약의 본문을 전하기 위한 주해 체계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서는 자음으로만 표기됐다. 따라서 일반 사람들은 히브리어 성서를 정확하게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소위 '읽기 전문가(바알 크리아)'가 성서를 읽어준 것이다. 읽기 전문가들은 성서 전체의 모음과 악센트를 다 암기하고 있었다.

 

이들에 대한 교육은 AD 7∼10세기에 바빌로니아와 팔레스틴의 유대인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이뤄졌다. 히브리어 성서의 모음화 작업은 이보다 훨씬 앞선 AD 1∼2세기에 일단 완성된 형태를 갖추었으며 8세기쯤에는 모음 악센트 표기체계가 확립됐다. 그래서 마소라 사본이 처음 선뵌 시기도 이 체계가 확립된 후인 AD 895년부터다.

 

마소라 학자들은 철자가 일정하지 않거나 발음이 다르게 들리는 것에 대해서는 성서 본문 여백에 주를 달았다. 이를 '난외(欄外) 마소라'라고 불렀다. 또 성서 끝부분에 주를 알파벳 순서로 배열, 정리한 '권말 마소라'도 있다. 이렇게 완성된 성서 본문을 '마소라 본문'이라 칭했다. 이 거창한 작업을 해낸 학자들이 마소라 학자들이다. 이들의 공로로 현재 우리는 히브리어 성서를 좀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모세5경 몇사람이 편집

 

성서는 실로 장구한 세월에 걸쳐 쓰여졌다. 구약의 경우 BC 1400여년부터 BC 430여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0여년 동안에 걸쳐 기록됐다. 그렇다면 기록은 어떤 형식으로 이뤄졌을까?

 

모세 오경은 통상 BC 1446년 출애굽 이후부터 모세가 모압 땅에서 마지막 숨을 거뒀던 BC 1406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성서비평학자들은 보고 있다. 오경의 저자가 모세라는 데는 크게 흔들림이 없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저자(author)와 기록자(writer)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지적이다.

 

예컨대 어느 유명 인사가 자신의 삶을 정리한 회고록을 출판할 때, 그 인사가 직접 작성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다수는 자신의 삶을 조명한 여러 자료와 그동안 모아놓은 메모 쪽지, 심지어 구술 형식의 녹음 테이프 등을 기록자에게 넘겨준 후 몇차례에 걸쳐 써온 기록을 보고 편집을 가미해 완성한다. 기록자를 선택할 때 자신의 생각과 철학 그리고 믿음의 체계와 세계관 등을 꿰뚫어 보는 문필가를 고르는 것은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이렇게 출판된 책의 저자는 결코 기록자가 아닌 유명 인사다. 이런 의미에서 모세 오경을 모세 자신이 직접, 그것도 몽땅 썼다고 보는 학자는 거의 없다.

 

이에 대한 반증 자료는 성서에서 얻을 수 있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창 5:1·개역한글) 이 문장이 개역개정에서는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모세는 이미 아담의 계보를 담은 책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당시 모세는 토판이나 점토판에 기록된 것과 아담의 계보와 같은 책자, 그리고 구전에 의해 전해져온 설화 등 모든 자료를 참고했으며 이를 누군가에게 넘겨줘 편집했을 것으로 비평학자들은 보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우주 및 아담과 하와의 창조, 아담의 타락(선악과 사건), 노아의 대홍수, 바벨탑 사건 등 이른바 ‘창세기 4대 사건’을 과연 모세가 어떻게 숙지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했을까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노아 홍수는 전 지구적 사건으로서 당시 자료들은 모두 소실됐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특히 노아 홍수를 BC 2517년 경으로 잡는다면 오경이 쓰여지기 시작했던 출애굽 시기까지 무려 1000년 이상의 틈이 발생한다(표 참조). 이렇게 장구한 세월 동안 모세는 어떻게 창세기 4대 사건을 비롯, 노아 홍수에 대한 이야기를 날짜별로 낱낱이 기록케 하고 편집에 관여했을까?

 

문제를 풀기 위해 먼저 성서에 등장하는 계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담(930세 향수)을 1대 조상으로 간주한다면 969세를 향수해 가장 장수한 므두셀라는 8대, 노아(950세 향수)는 10대, 아브라함(175세 향수)은 20대, 야곱(147세 향수)은 22대, 모세(120세 향수)는 26대가 된다.

 

여기서 나이를 계산해보면 므두셀라는 아담이 687세되던 해에 태어나 969세를 향수하고 죽기 때문에 아담과 무려 243년 동안 같은 세대를 살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므두셀라는 노아가 홍수를 맞았던 해에 죽는다. 당시 노아의 나이는 600세. 그러므로 므두셀라는 위로는 아담과 243년을, 아래로는 노아와 600년을 함께 산 것으로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함께 삶을 같이 하는 동안 므두셀라는 아담으로부터 에덴 동산에서 벌어졌던 꿈같은 이야기와 선악과 사건에 얽힌 한맺힌 절규의 상황 등을 정확하게 그리고 귀에 따갑도록 들었을 것이고 이런 내용을 노아에게 600년 동안 전해줬을 것이란 해석이다.

 

뿐만 아니라 노아의 아버지인 9대 라멕도 계산해보면 아담과 56년 동안 동시대를 살았다. 노아는 므두셀라와 아버지 라멕으로부터 자신이 596세가 되던 해까지 바로 이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청취할 수 있었다는 게 비평학자들의 설명이다.

 

또한 11대 셈은 20대인 아브라함이 159세가 되던 해까지 함께 생존했다. 대홍수가 터진 2년 후에 태어난 12대인 아르박삿도 아브라함과 88년 동안 같은 세대를 살았다. 13대 셀라도 118년 동안, 14대 에벨 역시 아브라함과 179년 동안 함께 지냈다. 15대 벨렉의 경우는 자신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11∼14대가 모두 생존해 있었던 거대 혈족사회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청취할 수 있었다. 이들 4대에 이르는 계보는 무엇보다 대홍수 이후의 상황, 특히 바벨탑 사건을 가장 생생하게 들었거나 경험했던 세대들이다. 16대 르우, 17대 스룩 역시 바벨탑 사건을 경험하면서 아브라함과 18년, 41년 각각 삶이 겹치기도 했다.

 

결국 계보를 역추적해 보면 창세기의 4대 사건을 비롯해 그들의 삶에 대한 양식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체계를 담은 자료 등이 단 한번도 끊기지 않고 모세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성서가 우리 손에 오기까지 인간의 편에서는 빈틈 없는, 하나님의 편에서는 의도된 전승 과정이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오경이 나오기까지 모세에게는 도대체 무슨 힘이 작용했을까?


모세5경은 구속 역사의 압축파일


고대근동학자인 피터 엔스는 저서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 영감설'에서 "성서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40여명의 저자에 의해 1500년 동안에 걸쳐 제작됐다"고 주장하면서 "그들 중에는 정치 지도자인 모세, 군 지도자인 여호수아, 목자이며 왕인 다윗, 과수원 주인 아모스, 총리 다니엘, 세리 마태, 의사 누가, 랍비 바울, 그리고 어부 베드로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스는 "성서는 놀랄 만한 통일성을 가진 책이며 그 안에는 결코 모순이나 비일관적인 주장들이 없다"면서 성서의 권위를 강조했다.

 

성서의 권위에 대해 사람들은 이따금 번민에 휩싸이게 된다. 번민의 결정적인 예가 신명기 후반부다. 신명기는 모세의 죽음을 전제하면서 선포된 비장한 유언적 강론들이다. 신명기 마지막 장인 34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의 경계 안에 있는 모든 곳을 모세에게 보여주신다. 비록 몸은 들어가지 못할지라도 그의 영은 가나안 땅을 답파하고 섭렵한 셈이 된 것이다.

 

12지파가 살게 될 영토를 다 보고 난 모세는 그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한다. 그리고 모세는 모압 평지 느보산에서 숨을 거둔다. 향년 120세. 신명기 기자는 모세가 죽는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다.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 34:7). 성서는 모세의 무덤이 어디인지를 밝히지 않았다. 모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기간은 30일이나 됐다. 그리고 기자는 모세의 영도력이 여호수아에게 순조롭게 이양됐음을 증언(신 34:9)한다.

 

바로 이 부분이 많은 이들을 번민케 하는 대목이다. 모세 사망이후의 기록은 '신명기의 저자가 과연 모세일까'하는 의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명기뿐만 아니라 모세 오경은 BC 13세기부터 BC 6세기까지 대략 700년에 걸친 구속의 역사와 신학적 자기 이해까지 들어 있는 일종의 '압축 파일'이다. 신명기에도 BC 13세기의 자료가 포함돼 있다.

 

따라서 모세의 죽음 이후에 대한 '첨부 파일'은 모세의 후계자 중 누군가가 신명기 안에 삽입했을 것으로 사본학자와 성서 비평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모세는 또 죽기 직전 자신의 무덤을 알리지 말 것 등을 지시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때문에 현대적 저작자 개념을 그대로 적용해 신명기 저자가 모세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를 범하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예컨대 모세가 죽기 직전, 눈의 아들 여호수아게 죽음 이후의 상황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를 지시했다면 그 상황 역시 모세의 저작권 내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탈무드는 모세 죽음 이후의 첨부 파일은 여호수아가 작성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런 문제는 신명기뿐만 아니다. 시편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된다. 시편 속에는 다윗의 심장을 울린 멜로디와 곡조, 강하고 느린 고음과 저음, 단조와 장조의 애절하고 장엄한 비트(beat) 등이 살아 숨쉬고 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로 이런 시편이라는 장르를 통해 야훼 신앙을 대중화시키는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다윗은 많은 시편을 직접 작사·작곡한 실제 저자로서, 비파와 수금 연주자로서, 또는 번역이나 번안가로서 삶의 현장을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결시켰던 것이다. 성서 기자는 다윗에 대해 '이스라엘의 노래하는 자'(삼하 23:2) 혹은 '유명한 수금 연주자'(삼상 16:18)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시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윗이 직접 쓴 것 외에도 '다윗에게 바쳐진(To David) 노래'들도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편 23편의 경우 당시 시문학과 음악에 뛰어난 천재적인 시인과 작곡가가 작사·작곡해 다윗에게 바친 작품이다. 그래서 시편에는 종종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다윗의 시, 영장으로 관악에 맞춘 노래' 등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다윗이 도입한 시편 장르를 성가대 지휘자에 맞춰서 작사·작곡했다는 의미다. 당시 천재적인 시문학가들 가운데 고라의 자손과 아삽은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성서는 이처럼 저자와 기자가 동일할 수도 있으나 상당 부분 다를 수 있다는 게 학자들의 공통된 해석이다. 이 과정에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저자가 직접 기록했다고 해서 더 권위 있고, 저자가 기록하지 않았다고 해서 덜 권위 있을 것이란 판단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가 왜 권위를 인정받을까? 이는 다름아닌 영감 때문이다. 성서가 영감된 하나님의 계시라는 주장은 신학자들이 만들어낸 학설이 아니다. 성서 자체가 이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

 

이 영감은 저자가 직접 쓴 본문이든, 신명기 후반부에서 모세의 죽음 이후 누군에 의해 덧붙여진 본문이든, 시편에서처럼 천재적인 시문학가가 써서 다윗에게 바친 본문이든 모두에게 미쳤다는 것이다. 이 본문은 최초의 성서 원전을 의미한다. 다만 번역 과정에서 필사자나 서기관의 오류가 끼어들 수 있는 여지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학자가 인정하고 있다.

 

[ 영감이란 ]

 

영감에 대해 에드워드 영은 저서 '진리의 말씀'에서 "영감은 성서 기자들에 대한 성령의 감독"이라고 전제하고 "그 결과 성서는 인간의 오류로부터 자유로운 신적 권위와 신적 진리성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벤저민 워필드도 저서 '영감과 성서의 저자'에서 "하나님 영의 초자연적 영향에 의해 인간 저자들의 기록물들인 성서는 신적 진실성을 담보받는다"며 성서 기록의 영감성을 강조했다.

 

영감에 대한 신학적 견해는 대략 8가지에 이른다.

 

첫째, 자연 영감설이다. 성서는 위대한 천재들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여기에 속한다. 성서 기록 과정에서 초자연적 요소를 부정하는 것이다.

 

둘째, 영적 조명설로 성서 기자가 영적인 조명을 받아 기록했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성서가 영감을 받아 기록됐다고 해서 다른 위대한 기독교 문학과 전혀 다를 바 없다고 보는 것이다.

 

셋째, 차등 영감설은 성서의 내용에 따라 영감의 정도가 각각 다르다는 주장이다.

 

넷째, 부분 영감설은 성서의 특정 부분만 영감에 의해 기록됐고, 그 외의 것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다.

 

다섯째, 개념적 영감설은 사상 영감설이라고도 불리며 성서의 개념과 사상은 영감됐으나 단어들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다.

 

여섯째,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은 기계적 혹은 받아쓰기 영감설이라고도 부른다. 성령의 감동에 의해 글자 한자 한자를 그대로 받아 적었다는 뜻이다. 즉 성서 기자들은 속기사나 받아쓰는 기계 역할을 한 것뿐이라는 주장이다. 이 같은 축자영감설에 대해서는 지나친 근본주의로 보는 비판도 있다. 이 영감설을 지지하게 되면 성서 개별 기자의 문체와 사상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일곱째, 유기적 영감설로 동력적 영감설이라고도 불린다. 축자영감설과 대치되는 주장이다. 성서 기자의 배경에 따라 표현의 차이는 있으나 그것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진실하다는 입장이다.

여덟째, 신정통주의 영감설이다. 이는 신학자 칼 바르트의 견해를 말한다. 바르트에 따르면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영감설은 이처럼 여러 형태로 설명될 수 있지만 크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다른 하나는 '그분은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하시려는가'에 대한 영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서 기자에게 영감을 주실 때, 그 기자를 결코 기계처럼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자신의 영으로 기자를 감동시킨 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고 기자의 인격과 개성, 교육의 정도 등을 통해 그 말씀을 선포토록 인도했다는 것이다.

 

특별계시와 일반계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리는 선포 행위다. 이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 이미 하나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알리는 말씀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자기 계기'라 할 수 있다. 계시란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인간에게 알리는 것을 말한다.

 

신학자들은 통상 이런 계시를 두 가지로 분류해 설명하고 있다. 일반 계시(자연 계시)와 특별 계시(초자연 계시)다. 일반 계시는 자연(창조물), 양심, 역사에 나타나는 계시를 말한다. 일반 계시에 대해 성경의 증언은 이렇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

 

그래서 일반 계시는 하나님의 창조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일반 계시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개인의 종교 경험이나 성경의 초자연적 사건도 모두 자연 계시의 차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칼 바르트(신정통주의)는 일반 계시를 부정한다. 오직 특별 계시만 인정한다. 일반 계시와 신의 접촉점은 없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특별 계시다. 그런가하면 부르너는 자연 계시를 믿는다. 하나님의 형상이 아직은 남아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일반 계시와 신의 접촉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특별 계시는 영적 진리에 대해 분명히 전달해주는 계시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 신구약 성경, 구속사(구원) 등이 특별 계시에 속한다. 특별 계시는 불과 연기 그리고 구름, 폭풍과 미풍, 주의 사자 등으로 나타나 자신을 계시하는 이른바 신현(神顯)과 음성이나 꿈 환상 등으로 계시하는 직접 방법, 그리고 기적 등 3가지 방법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하나님은 왜 특별 계시를 사용하실까'에 대해 신학자들은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하나님과 교제토록 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특별 계시에 대한 해석을 시대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교부시대에는 성경을 신적 계시와 동일시했고, 중세에는 구술적 계시를 덧붙여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기도 했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으며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을 인간의 작품으로 해석, 수준을 끌어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복음주의 노선은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아 특별 계시인 성경(원본)은 무오하다고 인정한다.

 

결론적으로 자연의 법칙에 무지하면 하나님의 일반 계시에 어두울 수밖에 없고, 성경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분별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우주와 인생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자 한다면 자연과 성경에 정통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이다(롬 1:20).

 

하나님 특별계시 내용

 

창세기부터 사사기를 거쳐 말라기까지 구약은 온통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불순종으로 만신창이가 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어찌 보면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꿈은 좌절된 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던 말라기에서부터 신약의 새 지평을 열었던 세례 요한까지 무려 400년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우리는 이 침묵의 기간을 '신구약 중간 시기'라 칭한다. 이 시기는 말씀이 끊겨버렸거나 기록되지 않았던 '말씀의 빈 공간기'이다.

 

만약 성서를 여기까지만 인정한다면 인류에게는 소망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꿈이 깨져버린 구약과 그리고 이어지는 하나님의 지루하고 깊은 침묵에서 인류가 그나마 붙잡을 수 있는 것은 '기약없는 메시아의 도래'일 것이다. 하지만 400년의 침묵과 방치의 세월 속에 버려진 것처럼 보였던 이스라엘 어느 마구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분출됐다.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의 활화산 같은 하나님 나라의 언어가 바로 그것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지상실현이란 목표를 이루는 데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나사렛 예수의 사역을 통해 보편적 의미를 획득하게 됐다. 1500년 동안 역사적 파란과 격랑을 헤쳐나오면서 구약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은 나사렛 예수 안에서 그렇게 이뤄진 것이다. 그래서 김회권 숭실대 교수는 저서 '현대인과 성서'를 통해 "나사렛 예수는 구약성서 속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틀을 요약하신 분"이라며 "구약성서의 열매는 신약성서"라고 정곡을 찔렀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비평학자들이 본 성서 전반에 걸쳐 도도하게 흐르는 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성서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로 성서 기자들에 의해 기록됐다. 하나님의 영감하에 성서 기자들은 자신들의 지적 문화적 배경을 사용했다. 성서 기자들은 특별 계시 내용을 오류 없이 원어로 저작한 것이다.

 

성서가 쓰이게 된 과정을 좀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이렇다. 특별 계시→영감→원본→사본→번역본(고대, 현대)을 거쳐 드디어 우리 손에 다가왔다. 성서가 쓰여지기 전, 먼저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있었고 그 계시를 받은 성서 기자는 하나님의 영에 의한 감동 즉, 영감에 의해 저작(딤후 3:15∼17, 벧후 1:21)된 것이 바로 성서 원본이다. 원본에서 사본으로 필사되는 과정에서 정경화 작업이 이뤄졌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특별 계시에서부터 성서 기자에 의해 원본이 쓰여지기까지 과정을 모두 하나님께서 감독하셨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감독은 성서 내용의 정확성을 보증한다는 의미라는 게 성서비평학자들의 견해다. 그래서 성서의 권위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에서 비롯된다. 신학자 루이스 스페리 체어퍼는 이 점에 대해 통찰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정의로만 설명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인간도 그렇게 쓰려고 해도, 비록 쓸 수 있다고 해도, 결코 쓸 수 없는 책이다."

 

그러면서 체어퍼는 천재적인 문학가들이 성서를 왜 저작하지 못했을까에 대해 "하나님의 특별 계시에 의해서만 성서는 쓰여졌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는 고대나 현대의 어떤 종교 경전이나 서적들에서 소개되는 것과 구별되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세상의 그 어떤 종교도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성과 인간 죄악에 대한 용서(죄사함)를 통전적으로 통합시키지는 못한다. 이교도들의 신들은 인간의 도덕성과 윤리에 무관심한 반면, 인간의 절대적 복종만을 요구한다. 성서는 그 자체가 매우 윤리적이지만 궁극은 윤리를 가르치는 데 있지 않다. 성서의 하나님은 거룩하시면서도(사 6:3, 합1:13) 죄인된 인간을 품으시고 구원의 세계로 초청하고 있다.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에 이르는 지혜와 믿음을 가르치는 것을 으뜸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런 으뜸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는 성서 원문(본문)이 과연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을까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 의문은 이미 성서가 암시하고 있다. "성경(구약 성서)은 폐하지 못하느니라"(요 10:35) 이는 지상에서 사역하던 중 예수께서 일찍이 선포한 말씀이다. 폐하지 못할 것이란 배경에는 인간에 의한 본문의 파손, 붕괴, 가치하락, 신뢰성 약화, 종식 등의 우려가 담겨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우려에 대해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 40:8)고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로 성서 기자에 의해 저작된 성서 본문은 하나님에 의해 보존(시 12:6∼7)되고 예수가 이를 확증하고 있다(요 10:35). 역설적이지만 성서의 권위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부여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