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성경 대탐구] <제3편> 사본의 필사

스카이7 2018. 2. 18. 13:47

[성경 대탐구] <제3편> 사본의 필사 


비전문가가 필사작업 오류 가능성 상존

 

◇필사의 오류 가능성=신약성서 27권이 정경으로 확정되기 이전, AD 2∼3세기까지 초기 기독교 문서들을 베낀 필사자들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했다. 글을 겨우 아는 일반 기독교인들이 일종의 봉사 차원에서 필사 작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런 현상은 필사 과정에서 '오류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는 오류가 발견된 본문을 읽으면서 원저자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를 밝히기 위해 종종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학자가 3세기 교부였던 오리겐이다. 그는 '마태복음에 대한 논평(Commentary on Matthew)'에서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사본들이 지나치게 많은 차이가 난다. 이것은 일부 필사자의 부주의와 그릇된 뻔뻔함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베낀 것을 한 번 더 검토하는 데 소홀하거나 점검 과정에서 자기 마음대로 말을 덧붙이거나 삭제해버렸다."

 

◇오류를 막기 위한 장치=초기 기독교 문서들이 필사됐던 고대 사회에는 인쇄기나 출판사, 나아가 저작권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다. 바로 그런 시대에 초기 기독교 문서들은 필사되고 또 필사돼 '사본의 사본의 사본의…'를 거듭한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책이 잘못 필사되는 변경(변개)을 막기 위한 장치가 사실상 없었다는 점이다. 기껏해야 저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만약 잘못 필사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협박이 전부였다.

 

이런 협박성 저주는 신약성서에 포함된 초기 기독교 문서 중 하나인 묵시문학(요한계시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 저자는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은 무시무시한 경고를 덧붙여놨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개역개정판)

 

민경식 박사는 저서 '성경 왜곡의 역사'에서 "이 구절은 두루마리의 예언, 즉 요한계시록의 책에서 어떤 말을 덧붙이거나 빼서는 안된다는 경고인데, 필사자들에게 던진 전형적인 위협"이라고 설명하면서 "이와 비슷한 저주는 초기 기독교 문서의 사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 박사는 그러면서 라틴 신학자 루피누스가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인 신학자이며 교부였던 오리게네스 작품 가운데 하나를 번역하면서 필사자들에게 엄중하게 경고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 내용은 당시 필사 과정에서 잘못 베낀 변개에 따른 원저자의 불만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충분히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필사자들의 실수 원인=그렇다면 필사자들은 사본을 베낄 때 왜 이런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을까. 초기 신약성서 사본들에서 발견되는 다수의 잘못된 문장, 즉 이문(異文)들은 신학이나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무관했다는 게 성서비평학 및 사본학자들의 주장이다.

 

대개 초기 기독교 시대의 필사자들은 전문적인 필사 훈련을 받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 따라서 단순한 실수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펜이 미끄러져서 글자를 잘못 썼거나 우연히 단어가 누락됐거나 부주의로 어떤 단어나 글자가 삽입됐거나 철자를 잘못 옮겨 이문이 생긴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유능하고 잘 훈련된 필사자라 해도 더러 실수를 범했던 흔적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런 경우도 신학적 이유로 변개한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게 학자들의 설명이다. 세련된 필사자들은 분명히 수정돼야 하는 오류가 발견됐을 때, 본문의 내용에 모순이 있거나 고유명사 특히 지리적 명칭이 다르게 표기됐을 때, 그리고 성서의 본문을 잘못 인용한 부분이 발견됐을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한 차원에서 변개했다.

 

◇변개는 변개를 생산=하지만 이처럼 순수한 동기에서 변개했다손 치더라도 변개는 어쩔 수 없이 변개일 수밖에 없다. 매우 우수한 고대 사본 중 하나인 4세기 바티칸 사본은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다수의 사본에 따르면 히브리서 저자는 앞부분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그리스어 PHER-ON을 의미·히 1:3)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바티칸 사본에서는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나타내시며"(그리스어 PHANERON을 의미·히 1:3)로 돼 있다.

 

여러 세기가 지난 뒤 바티칸 사본의 두번째 필사자는 이 사본을 읽고 '나타내시며'라는 단어가 생소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 단어를 '붙드시며'로 고쳤다. 다시 몇 세기가 흘렀다. 세번째 필사자는 이 사본을 읽고 두번째 필사자가 수정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붙드시며'를 지우고 수정 이전의 단어인 '나타내시며'로 다시 적었다. 그리고 세번째 필사자는 난 외에 이렇게 낙서를 했다. "어리석은 무뢰한이여! 옛 문서를 그대로 두시오! 변개시키지 말고!"

 

그리스도가 능력의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붙잡고 있다는 표현과 그리스도가 능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드러낸다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자연과학적인 의미가 숨어 있는 말씀으로서 중력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후자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온 세상에 울려퍼진다는 복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게 필사자가 일단 본문을 바꾸면 그것은 우발적이든 고의든 상관없이 사본에서 이를 수정하지 않는 한 그 이문은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저자가 실제로 기록한 원문 즉 본문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 독문 혹은 독법 ] 

 해당 구절의 읽기. 정경이 확정되기 전, 초기 기독교에서 독법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각종 문서의 사본을 한 사람이 읽어주면 여러 필사자가 그 소리를 듣고 옮겨 적는 방법으로 '사본의 사본'이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독법이 잘못되면 사본의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 변개 혹은 변경 ]

원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내용이나 단어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변개는 고의적인 변개와 우발적인 변개로 나눌 수 있다. 변개의 결과는 왜곡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 사본 ] 

손으로 베껴쓴 문서를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15세기 인쇄술이 보편화되기 이전, 필사자들에 의해 손으로 베껴쓴 책을 사본이라 한다. 신약의 내용이 담겨 있으면 신약성서 사본, 구약의 내용이 들어 있으면 구약성서 사본이라 지칭한다.

 

[ 원본 ]

원 저자가 기록하거나 받아쓰게 한 최초의 본문을 말한다. 신구약성서의 원본은 단 하나도 없다. 원본을 손으로 베낀 일부 사본만 있을 뿐이다.

 

[ 이문 ]

변개된 독법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문은 원저자의 뜻과는 다른 형태의 내용을 낳게 되기 때문에 이문을 찾아나서는 것은 원문을 회복하는 중요한 추적이라 할 수 있다.

 

[ 필사자 ]

문서(책)를 놓고 한 자 한 자 손으로 베끼는 작업을 필사라 하며 필사에 참여한 사람을 필사자라 부른다. 고대시대 필사자 중에는 비전문가 수준과 전문가 수준의 사람이 있었다. 지금처럼 아르바이트나 파트타임 형식의 종사자와 전문직종으로서 종사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용 첨부 됐지만 원문 훼손 없어 권위

 

◇자유를 위한 갈라디아서=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해설하는 매우 중요한 서신 중 하나다. 김회권 숭실대 교수는 저서 '현대인과 성서'를 통해 "구원받은 기독교인이 누리는 자유의 본질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나서 "그것은 율법의 도덕적 요구로부터 자유롭게 마음대로 사는 삶을 긍정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율법주의의 멍에를 메고 자아분열을 겪는 정신적 노이로제 상태의 회귀도 아니다"고 설명한다. 김 교수는 갈라디아서 분석을 통해 '기독교적 자유는 모든 사람을 향해 사랑의 종노릇하게 만드는 자유'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런 갈라디아서 사본은 주후 200년쯤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저자인 바울이 서신을 쓴 때로부터 대략 150년 후의 일이다. 바꿔 설명하면 바울의 편지 원본은 150년 동안 회람·필사를 거듭했음을 의미한다. 끊임없이 필사되는 동안 바울의 편지 원본은 유실됐거나 닳고닳아 파손되고 말았을 것이고 마침내 어느 상황에 이르러 필사본을 원본과 대조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시점에 도달하고 만 것이다.

 

◇갈라디아서 원본문=그렇다면 갈라디어서 원문, 즉 바울의 자필 원고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갈라디아라는 이름은 바울이 여러 교회를 설립한 지역명이다. 지금의 터키, 당시에는 소아시아에 위치한 지방을 뜻한다. 편지의 수신자는 추측컨대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의 어느 특정 교회를 지정하지 않은 점으로 미뤄 그 지방에 거주하는 모든 기독교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부터 성서사본학자나 비평학자들은 논리적 추론력을 발휘한다. 먼저 바울은 한 통의 편지만을 쓴 후 그 편지가 갈라디아 지방 교회에서 회람되기를 원했는지, 한 통의 편지를 여러 통으로 만들어 회람되기를 원했는지에 대한 추론이다. 민경식 박사는 저서 '성경 왜곡의 역사'에서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일단 바울이 여러 개의 편지를 만들었다고 가정한다면 그 편지들은 바울에 의해 직접 쓰여진 것이 아니라 바울의 신학과 사상을 꿰뚫어보는 최측근 인사 즉 비서격인 누군가에 의해 작성됐을 것으로 민 박사는 보고 있다. 그 증거로 서신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자신의 필체로 직접 추신을 덧붙인 것을 들 수 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갈 6:11) 이는 수신자들에게 그 편지가 바울의 것임을 확인시켜주기 위해서다. 외관상으로 볼 때 바울의 필체는 그 편지를 받아 쓴 사람의 필체보다 더 크게 썼다는 것이다.

 

이런 추신 행위는 고대사회에서 일종의 관행으로 굳어졌던 방법이다. 이를테면 유명 화가가 자신의 화법을 가장 섬세하게 잘 묘사하는 제자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 뒤 마지막 작업에서 비밀스럽게 간직한 낙관을 찍어 그 작품이 자신의 것임을 표시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편지를 대필케 한 결정적 증거는 또 있다. 바울 서신 중 로마서에는 직접 받아 쓴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 바로 더디오다(롬 16:22).

 

◇사본의 오류 가능성=여기서 사본학자들이나 비평학자들의 고민이 시작된다. 바울이 자신의 편지를 말로 불러주는 과정에서 단어 하나하나를 일일이 불러줬는지, 아니면 핵심만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받아 쓴 사람에게 맡겼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민 박사는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고대사회에서 일반화된 대필 형태라고 설명한다.

 

만약 기본 골격만을 설명하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대필자에게 일임했다면 과연 바울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채워넣었는지에 대한 문제에 부딪히고 만다. 이와 함께 바울이 글자 하나하나를 낱낱이 받아 적게 했다 치더라도 대필자가 불어준 그대로 아무런 오류 없이 받아 적었겠느냐에 대한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쟁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비록 바울이 불어준 편지를 대필자가 100% 정확하게 받아 적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본문을 필사자가 베낄 때, 오류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제기될 수 있다. 더구나 바울이 직접 보는 앞에서 원본문을 필사자들이 베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필사의 과정은 짧은 시간에 이뤄진 게 아니라 1·2·3세기, 그리고 그 이후로도 여러 세기 동안에 걸쳐 이뤄진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사본은 바울의 편지 원본이 아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직접 작성케 한 첫번째 필사본도 아니다. 그런 필사본을 베낀 두번째 혹은 세번째 필사본도 아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나마 완전하다고 할 수 있는 최초의 갈라디어서 사본은 '파피루스 사본 46번'이다. 이 번호는 파피루스 사본 목록 가운데 46번째로 등재됐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사본도 단편일 뿐이라고 민 박사는 지적한다. 갈라디아서 본문을 상당량 포함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빠진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이 사본 역시 정확하게 필사됐느냐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사본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성서의 권위는 그대로=갈라디아서 원본문에 접근하는 일은 이토록 엄청나게 힘들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껏해야 필사 전승의 초기단계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원본문에 접근하는 것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원본문의 단락이나 단어 등이 필사 과정에서 빠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필사가 거듭되면서 원본문에 누군가가 뭔가를 끼워넣을 수는 있으나 본문 자체를 빼거나 훼손하는 일은 사실상 그렇게 흔하지 않다는 게 다수 학자들의 견해다. 그래서 신현우 웨스터민스터 신학대 교수는 이런 표현을 한다. "성서 본문은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자라고 있다."

 

비록 필사 과정에서 오류가 있다 하더라도 성서의 권위가 인정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용어해설

 

[ 파피루스 ]

 

파피루스는 생물 분류 체계상 벼목(目), 사초과(科)의 다년생초본에 해당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나일강 유역의 파피루스 줄기를 채취, 껍질을 벗기고 흰 속을 가늘게 찢어 건조시킨 뒤 다시 문질러 매끄러운 파피루스 종이를 만들었다. 파피루스는 이집트 제5왕조(BC 2494∼2345)부터 AD 996년 무렵까지 대략 3500년 동안 사용됐다.

 

이는 양피지나 점토판과 함께 고대의 중요한 3대 필기 재료 중 하나였다. 파피루스는 당시 이집트의 특산물로 자체 사용 외에도 서아시아나 지중해 연안 각 지방에 비싼 값으로 수출하는 왕가의 재원이었다. 용지의 크기는 보통 24×15㎝ 정도였으며 서적의 경우 20장씩 연결해 1권으로 판매되기도 했다. 긴 것은 890㎝나 됐으며 20장을 겹쳐서 오늘날 책과 같이 만들어 기록한 경우도 발견된다.

 

신구약 성서의 사본 역시 파피루스에 필사됐다. 하지만 파피루스는 건조한 사막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견디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말라 부서져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파피루스 사본 가운데 남은 것은 그리스나 이탈리아 지역에서 씌어진 극히 일부뿐인데 이 지역의 기후가 습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주로 양 염소 송아지 등 동물의 가죽을 가공·처리해 만든 양피지도 있었다.

 

가죽을 보다 철저하게 세척하고 늘이고 문지르는 방법으로 양피지를 만들어 필기 재료로 사용한 것이다. 양피지는 양면 사용이 가능하고, 파피루스에 비해 수명이 훨씬 길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 결과 파피루스 사본에서 일부는 두루마리 사본으로 대체되기에 이른 것이다.

 

요한복음 속 ‘간음한 여인’ 사본엔 빠져

 

신약성서 형성에 영향을 미친 두 축을 든다면 하나는 구약성서이고 다른 하나는 헬라 철학과 그 시대의 종교사상이라 할 수 있다. 신약성서를 폭넓게 그리고 깊이 있게 꿰뚫어보기 위해선 이 두 축을 통찰력 있게 들여다봐야 한다.

 

김회권 숭실대 교수는 저서 ‘현대인과 성서’를 통해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의 어딘가를 직간접적으로 가리키거나 상기시키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따라서 성서 해석은 신구약간 깊은 해석학적 관계를 탐구하지 않고는 진행될 수 없다”고 말했다. 신약성서 어디에도 밑도 끝도 없이 등장하는 신학사상이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연장선에서 김 교수는 저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신약성서는 구약의 숱한 이미지와 유추, 은유와 상징이 없으면 효과적으로 해독하기 힘든 암호 같은 책이다. 특히 요한복음은 가장 은밀하고 오묘한 방식으로 구약성서의 본문, 이미지, 신학사상, 그리고 인물들을 참조하거나 암시하거나 그것들과 해석학적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하나님 아들로서 요한복음

그렇다! 요한복음은 누가 봐도 신비 그 자체다. 신약의 창세기를 표방하는 책이면서 동시에 율법서에 첫번째로 등장하는 창세기의 해설서와 같다. 그런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의미를 가장 깊이 있는 기독론 입장에서 풀어가고 있는 책이 바로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의 초점은 '하나님의 아들'이 왜 온전한 사람이 됐는가를 밝히는 데 있다.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의 신성'에 무게를 두고 풀어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공간복음(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은 인간 예수가 어떤 이유로 신앙고백의 대상인 주와 그리스도가 됐는가를 밝히는데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예수의 인성(온전한 인간)'에 무게를 두고 있다. 양쪽을 조합하면 그 결론은 자명하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탄생 이전 자료들

이런 신비의 메시지 구조를 갖고 있는 요한복음 역시 단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저자 요한은 자신이 쓴 복음서의 토대가 되는 풍부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사본 학자인 에르만은 저서 '신약성서'에서 "요한은 예수가 행한 여러가지 표적에 대해 이야기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예수의 설교를 보도하는 자료도 확보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요한복음뿐만이 아니다. 누가복음 1장 1∼4절에서 저자는 많은 선임자들이 '예수의 말과 행적에 대한 기사'를 기록했으며 자기는 그것들을 읽어보고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과 상의하여 자기의 복음서를 쓰기로 결심했다고 전한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러한 자료들을 한데 엮어 예수의 생애와 사역 그리고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간음현장 여인 기사

그런데 요한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다보면 눈길이 멈추는 곳이 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 대한 기사(요 8:1∼11)가 그것이다. 여기가 관전 포인트다. 예수의 대적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파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 앞에 끌고 나오는 장면에서부터 이 이야기는 많은 이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당시 예수는 성전에서 교육 중이었다. 아마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고 있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대적자들이 이 여인을 예수 앞에 끌고 온 것은 너무나 의도적이다. 예수를 시험키 위해서였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여야 마땅하다. 따라서 예수가 만약 율법대로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말하면 그동안 자신이 가르쳤던 사랑과 자비, 용서라는 가르침에 역행하게 된다. 반대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하면 율법을 정면으로 어기게 된다. 어느 쪽이든 함정이 숨어 있긴 마찬가지다. 대적자들은 이 함정에서 예수가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에 대해 알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즉답을 피한다.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지를 발휘하는 장면이 기발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땅에 글을 쓴다. 하지만 대적자들은 계속 질문을 던진다. 끝내 예수는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리고 땅바닥에 무슨 글을 쓴다. 그러자 여인을 데려왔던 사람들은 어느새 하나 둘 현장에서 사라져버린다. 그 자리에는 예수와 여인만 남아 있다. 여인을 쳐다보면서 예수는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묻는다. 여인의 대답은 지극히 간결하다. "주여, 없나이다."

 

여인에 대해 예수는 마지막으로 주문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연민과 재치 넘치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다면 남자는 어디에 있었을까? 모세의 율법에는 두 사람 모두 돌로 쳐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도대체 땅바닥에 무슨 글을 썼을까? 고대의 한 전승에 따르면 예수는 이 여인을 고발한 자들의 죄를 땅에 적고 있었다고 전한다.

 

◇다수 사본에 없는 간음 현장 기사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는 현재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4복음서 중 요한복음서에만 등장하는 기사다. 이 단락은 초기 대부분의 사본, 즉 중요한 사본에는 빠져 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본에는 7장 36절 뒤에, 혹은 7장 44절(몇몇 그루지야어 번역본 사본들) 뒤에, 또는 21장 25절 뒤에 각각 삽입돼 있다. 또 누가복음 21장 38절 뒤에 들어가 있는 사본도 있다. 이렇게 정작 중요한 사본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일부 사본엔 여기저기에 배치돼 있었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초기 사본에 빠졌다고 해서 반드시 저자 요한이 쓴 '원본문'에 없다고 단정짓기에는 성급한 면이 없지 않겠지만 그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게 사본 학자들의 주장이다.

 

오늘날 성경, 원본문과 큰차이 없어

 

성서비평학의 대가로 알려진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브루스 M 메츠거 박사는 저서 '신약 그리스어 본문 주석'에서 "간음한 여인 이야기가 요한에게서 유래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압도적"이라고 전제하면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서른개 사본 중에서 불과 다섯개만이 그 기사를 보존하고 있을 뿐"이라며 본문에 이 기사가 빠져 있음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요한복음 원본문엔 이 기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성서공회) 위원회에서는 그 문단이 원래는 제4복음서의 일부가 아니었다는데 만장일치를 보았다"고 역설한 뒤 "대다수 위원은 그 문단이 분명히 오래된 점을 감안해 그것을 인쇄하고 이중 꺾쇠 괄호로 묶어 요한복음 7장 52절 뒤에 포함시키기로 했다"며 그 배경에 대해 소상히 밝히고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에는 메츠거 박사가 설명한 대로 이 기사는 요한복음 7장 52절 뒤에 배치돼 있으며 기사가 끝나는 8장 11절까지 괄호로 처리하고 있다. 흔히 괄호로 묶어 처리한 문단은 필사자들이 괄호 내의 기사가 초기 사본에 포함돼 있었다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기사가 원본문에서 빠졌을 것이란 개연성을 높여주는 증거는 또 있다. 문단의 문체와 어휘가 요한복음의 나머지 부분들과 현저히 다르기 때문이다. 기사가 끝나는 8장 12절 이하와 연속성을 가지지 못하며 따라서 글의 흐름에 방해를 받고 있다. 사본학적 증거 외에도 이런 내적 증거 때문에 이 기사는 요한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메츠거 박사는 강조하고 있다.

 

성서비평학과 사본학적인 이런 주장은 한국 교회 다수의 평신도들에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충격 그 자체에서 진일보하지 못한다면 성서에 접근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충고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5000여개에 달하는 신약성서 사본 가운데 어떤 두 사본도 모든 점에서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있다.

 

수없이 거듭되는 필사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실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읽어주는 사람이 잘못 발음할 수도 있고, 정확하게 읽어줬다 치더라도 그것을 다른 단어로 이해할 수 있고, 필사자가 시력이 약해 잘못 기재할 수 있고, 너무 피곤해서 잠깐 졸다가 실수할 수도 있고….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들고 있는 성경은 원본과 차이가 있단 말일까? 만약 그렇다면 성경의 권위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결론을 말하자면 예수가 가지고 강론했던 구약성서와 사도성을 지닌 저자들에 의해 저작된 신약성서 원본문은 손에 들고 있는 지금의 성경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게 성서비평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성서 원본문 추적, 힘들지만 위대한 시도


신약성서는 단 한 곳도 독립적으로 갑자기 씌어지지 않았다.

 

신약성서의 토양은 구약성서이고 따라서 거기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단어와 문장에 숨겨진 사상과 의미가 모두 구약성서와 직간접적으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구약은 구약대로, 신약은 신약대로 여러 책들과 톱니처럼 맞물려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건을 놓고 4명의 각기 다른 저자가 거의 비슷한 자료를 가지고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 것이 4복음서다. 그런가 하면 누가복음서의 저자인 누가는 그리스도가 설파한 어록(복음)을 당시 사도들이 '몸소 어떻게' 전했는가를 증언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특정 민족이나 이방인의 구세주가 아닌 '왜 전 인류의 구원자인가'를 변증하고 있다. 그것이 사도행전이다. 


신구약 전체를 통전적으로 들여다보면 BC 13세기부터 AD 2세기까지 대략 1500년에 걸쳐 무려 40명 이상의 선지자와 사도성을 지닌 저자들에 의해 기록됐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저자들의 증언이자 고백이다. 성서가 무조건 신봉되지 않고 신구약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자세하게 분석되고 해석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서 원본문 접근의 한계=그런 점에서 성서 원본문에 접근하려는 시도야말로 가장 힘든, 그렇지만 위대한 결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첫째는 성서 원본이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현존하는 사본들마저 모두 다르다는 데 있다. 신약성서 사본만도 5000여개에 달한다. 그 사본 가운데 단 하나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본들마다 잘못 표기된 단어나 문장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뜻한다. 세계성서공회연합회 그리스어 신약성서 편집위원회에 보고된 이문(異文)도 무려 2000여개에 달한다. 


◇이문이 만들어진 이유=그렇다면 이문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사본 학자들은 두 가지로 요약한다. 하나는 필사자의 우발적인 실수에 의한 변개(변형)로, 다른 하나는 의도적인 변개로 이문이 탄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둘 사이의 경계선은 분명치 않다. 우발적인 실수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찾는다면 동일한 두 단어의 중간에 놓인 단어나 행들을 베껴 쓰는 과정에서 누락시킨 경우를 꼽을 수 있다. 필사자가 본문 중 어느 행을 베껴 쓴 뒤, 다시 다음 행을 베껴 쓰고자 할 때 우연히 방금 베껴 쓴 행과 단어가 동일한 것을 발견하고 그 행을 베껴 쓴 것으로 착각, 이를 누락시킨 경우다.


◇우발적 실수=누가복음 12장 8∼9절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8절)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9절)"


이 단락이 들어 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파피루스 사본에는 9절 전체가 빠져 있다. 8절에서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를 베껴 쓴 어느 필사자가 다시 눈을 대본으로 돌렸을 때, 9절의 동일한 표현이 눈에 들어오자 이를 금방 베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실수는 치명적인 이문을 낳기도 한다는 게 세계성서공회연합회 명예 번역자문위원 민경식 박사의 주장이다. 그 사례는 매우 훌륭한 사본 가운데 하나인 4세기의 바티칸 사본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민 박사는 저서 '성경 왜곡의 역사'에서 지적하고 있다. 문제의 단락은 바로 요한복음 17장 15절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로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문(일명 주기도문·마 6:9∼13)으로 기도의 표본이 되고 있다. 이 대목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다. 예수는 십자가의 고난을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계셨으나 제자들의 믿음이 너무 약해 그들이 자신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질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마 26:31).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복음 전파의 도구로 사용될 것을 내다보시고 기도한 것이다. 이런 절박한 상황을 현재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I do not ask that you keep them from the world, but that you keep them from the evil one)"


그런데 사본 학자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 바티칸 사본에는 두번째 행인 world부터 from the까지 빠져 있다. 그래서 예수는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악에서 보전하시기를 위함이 아니요(I do not ask that you keep them from the evil one)"라고 부적절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우발적인 오류 생기는 이유

 

우발적인 오류는 '비슷하게 보이는' 단어들 때문이 아니라 '비슷하게 들리는' 단어들 때문에 발생하기도 한다. 이같은 현상은 4세기 이후 필사에서 자주 등장하곤 한다. 예컨대 누군가가 불러주는 것을 필사자가 받아쓸 때 두 단어의 발음이 똑같은 경우 필사자는 자신의 부주의로 그만 사본에 틀린 단어를 적어 넣고 말았다. 비록 단어는 달라도 의미가 통할 때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 한글에서 음절의 끝 자음이 뒤에 오는 자음과 만날 때,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닮아서 그와 비슷하거나 같은 소리로 바뀌는 이른바 자음동화 현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로마서 5장 1절이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以信稱義)'는 구원론의 핵심을 설파하면서 그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축복과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 담대한 필치로 전개하고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문제가 되는 부분은 '화평을 누리자'인데 여기서 '화평을 누리자(εχ-ωμεν )'와 '화평을 누린다(εχο-μεν )'의 그리스어 발음은 똑같다. 그리스어 문법상 '누리자'는 가정법으로 권유형에 속하며 '누린다'는 직설법에 해당한다. 따라서 '누리자'로 표현하면 바울이 하나님과 함께 다른 사람들에게 화평을 추구할 것을 촉구하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누린다'로 해석하면 바울이 하나님과 함께 화평을 누리는 것에 대한 확신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일부 초기 사본들을 포함해 다수의 사본은 권유형인 '누리자'로 필사돼 있는 반면 또다른 사본에는 직설법인 '누린다'로 돼 있다.


한글성경 가운데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은 '누리자'로, 표준새번역(누립니다) 새번역(누리고 있습니다) 공동번역(누리게 되었습니다) 공동번역 개정판(〃) 등은 시제만 달리하고 있을 뿐 직설법을 사용하고 있다. 영어성경(NIV)은 "Therefore, since we have…,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로 번역하고 있어 직설법을 따르고 있다.


◇치명적인 실수=이런 실수는 성서비평학자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부분이다. 진정 바울이 불러준 단어, 즉 원본문이 무엇인지를 추적하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가정법과 직설법 중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그 의미는 통한다. 그렇지만 원본문을 추적하는데 애를 먹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우발적 실수에 의해 저질러진 이문들은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원본문을 찾아내는데 그다지 큰 어려움이 따르지 않는다.


누가 봐도 엉뚱한 단어나 문장으로 해석돼 성서비평학자들의 눈에 금방 포착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하찮은 이문이라 해도 원본문에서 일탈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창조론부터 말세론에 이르는 성서신학적 내용이나 여호와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신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론, 보혜사로 오신 성령론, 이신칭의에 기초를 둔 구원론, 교회론 등 조직신학적 관점 등 성서 전반에 흐르는 신학의 골격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마가복음 마지막 12구절 후대에 추가됐다


지금까지 알려진 신약성서 전체 또는 일부 그리스어 사본들은 대략 5000여개에 달한다. 이들 사본 중 무작위로 두 사본을 뽑아 비교·검토했을 때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는 단 하나도 없다. 5000여개에 달하는 신약성서 사본들은 저마다 어떤 형태로든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성서공회연합회가 최근 공식적으로 집계한 이문(異文), 즉 필사과정에서 본문과 다른 형태로 잘못 베껴진 어휘 등은 2000여개에 달하며 지금도 성서비평학자들에 의해 이문들은 계속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성서 본문에 더 가까이 접근하고자 한다면 두 가지 가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나는 성서 원본문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존하는 사본들조차 서로 다르다는 가정이다. 그럼에도 성서 원본문을 찾겠다고 나선다면 결국에는 또 하나의 '미완의 석의(釋義)'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시대부터 1516년 바젤에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에 의해 그리스어 성서가 최초로 인쇄될 때까지 신약성서의 사본은 대략 1500여년에 걸쳐 셀 수 없는 필사의 과정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주후 60∼70년쯤 신약성서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저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가복음의 결론 부분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의 기사'와 함께 성서비평학자들을 무척 곤혹스럽게 만드는 대목이다. 


◇기적으로 가득찬 마가복음=복음서를 최초로 기록한 마가는 베드로의 비서이자 통역자(행 12:12)였다. 마가복음은 네로 황제의 끔찍스런 박해가 진행되고 있었던 때에 기록됐다. 당시 다수의 성도들은 '죽느냐 사느냐'라는 엄청난 시험과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마가는 기독교인들을 위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방에 전하고자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다. 마가복음의 3분의 1 정도가 직접 혹은 간접으로 기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1장에만 해도 다섯개의 기적이 언급되고 있을 정도다. 


마가복음의 맨 뒷부분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하고 그날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장사가 진행된다(막 15:42∼47). 안식일 다음날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두 여인은 당시 관습에 따라 예수의 시신에 기름을 바르고자 무덤을 찾아 나섰는데 그곳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목격한다.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돌이 옆으로 굴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 바로 그때 흰옷 입은 청년을 만나고 그 청년은 이렇게 말한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 16:6) 


그리고 여인들에게,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예수는 그들보다 앞서 갈릴리로 가고 있으니 과거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거기서 예수를 보게 될 것을 알려주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여인들은 무덤에서 도망나와 아무에게도 '예수의 부활' 사건을 말하지 않는다.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막 16:8). 


그리고 8절 이후부터 마지막 20절까지 열두 개의 절은 괄호로 묶어 처리하고 있다. 괄호로 처리된 열두 개 절의 내용은 예수가 친히 막달라 마리아 앞에 나타나는 것을 시작으로, 마리아가 예수의 부활사실을 제자들에게 가서 말하지만 그들이 믿지 않더라(막 16:9∼11)는 내용과 예수가 식탁에 모여 있는 열한 제자(가룟 유다 제외) 앞에 나타나는 장면 등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믿음 없음을 꾸짖고 만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면서 예수는 말한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니라"(막 16:17∼18) 


◇끝이 추가된 마가복음=기독교인들은 '미지의 방언'으로 말할 수 있다는 근거를 여기서 찾기도 한다. 특히 이 구절은 맹독성 뱀을 들어올리는 관습을 갖고 있는 애팔래치아 사람들이 가장 즐겨 인용하는 단락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마가복음의 마지막 단락은 "제자들이 나가 예수의 부활 사건을 두루 전파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문제는 괄호로 묶어 처리된 마가복음의 마지막 열두 개 절이 원래 마가복음에는 들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후대에 필사자가 덧붙인 단락이다. 


그렇다면 이런 단락이 첨가되지 않고 본문이 그대로 끝을 맺었다면 어떻게 될까? 대답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다. 마가복음이 만약 16장 8절에서 끝난다면 결론이 없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가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분명히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확언했는데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확언'은 없는 셈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알리지 않았고, 그로 인해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알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부활한 예수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결론도 모르는 채 갑작스럽게 종결되는 복음을 보고 깊은 번민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마가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서의 권위에 하자 없는 마가복음=이 추론에 견해를 같이하는 학자들은 마가의 의도를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모티브를 숨겨놓기 위해서"라고 해석한다. 성서의 원본문을 이렇게 추적하다 보면 당연히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문제의 단락이 마가복음의 일부(원본문)가 아니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성서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까? 이 이야기에도 성서의 권위는 원본문처럼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대답은 다양하다. 학문의 깊이와 믿음의 체계에 따라 다르다. 분명한 것은 예수가 당시 가지고 강론했던 구약성서와 예수의 행적과 그의 가르침을 담은 서신, 복음서, 묵시문학 등 신약성서는 지금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성경과 결코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이 점이 비평학자들이 조언하는 핵심이다. 

 

마지막 12구절의 비밀

 

성서비평학자인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브루스 M 메츠거 박사는 저서 '신약 그리스어 본문 주석'에서 "통상 마가복음의 본문으로 인정되는 마지막 열두 구절은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 두 사본, 시내산 시리아 번역본 사본 등 100여개의 사본들에는 등장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후대에 누군가가 더 적당한 결론을 제공하기 위해 이 부분을 첨가한 것"이라고 밝혔다. 문제의 열두 개 절이 마가복음 원본문에 있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비평학자들이 동의하는 부분이다. 


비평학자들은 열두 개 절이 원래 마가복음 본문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사본학적인 증거 외에 '내적 증거'도 강조하고 있다. 이를테면 본문이 끝나는 16장 8절의 주어는 여자들인 반면, 9절의 주어는 예수다. 게다가 이 단락이 시작되는 9절에서는 마치 이전에 전혀 언급된 적이 없는 것처럼 마리아를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마리아는 같은 장 1절에서 이미 소개되고 있어 단락의 흐름이 극히 부자연스럽다는 게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런 점 때문에 메츠거 박사는 문제의 단락들에는 외경의 색채가 감돌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렇게 문제의 단락이 추가된 것에 대해 비평학자들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마가복음의 마지막 페이지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민경식 박사는 바로 이 떨어져 나간 마지막 페이지에 갈릴리에서 예수가 제자들을 만나는 내용이 담겨 있었을 것이라고 저서 '성경 왜곡의 역사'에서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마가복음의 사본들은 마지막 페이지가 없는 어떤 사본을 '공통 조상'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현존하는 마가복음의 사본들은 바로 이 끝이 잘린 사본으로부터 왔다는 설명이다. 


왜 본문을 변경했을까

 

◇필사자의 객관적 판단에 따른 변개= 필사자들은 왜 본문을 변경시켰을까? 성서 본문이 객관적인 사실과 다르다고 판단, 본문을 바꾸는 경우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마가복음의 시작부분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저자는 마가복음의 도입부분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한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문제는 이사야의 글(이사야서)에 인용문이 없다는 데 있다. 이 인용문은 이사야서가 아닌 말라기 3장 1절과 출애굽기 23장 20절의 표현을 조화시킨 구절이다. 저자는 인용문의 출처를 잘못 서술하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필사자들은 이것이 잘못된 인용문인지를 알아차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문에서 '이사야의'를 삭제하고 "…선지자의 글에"로 변개시켰다. 후대 여러 사본에서 '이사야의 글'이란 문구가 빠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마가가 원래 무엇을 의미하기 위해 '이사야의 글'을 인용했는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오래된 우수한 사본들에 담겨 있는 인용문은 이사야서로 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도 이런 논란이 제기되고 있지만 오래된 사본을 따르고 있다.


◇필사자의 주관적 판단에 따른 변개= 또한 필사자들은 주관적 판단에 의해 본문을 변개시킨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예수는 시대의 종말을 예고하면서 이렇게 설파한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


필사자들은 이 구절에서 당혹감을 느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언제 종말이 올지 모른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것이다. 만약 이 문구대로 예수가 종말의 시기를 모른다고 가정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라는 등식이 깨지고 말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일부 필사자들은 '아들도 모르고'의 문장을 삭제해 버렸다. 비록 천사들은 모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는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삭제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한 것이다.


◇필사자의 신학적 판단에 따른 변개=필사자들이 분명한 신학적인 이유로 본문을 변경시킨 경우도 없지 않다. 이단들이 본문을 이용할 수 없도록 확실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누가복음 5장 37∼39절이 여기에 해당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필사자들은 여기서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에 대한 예수의 비유는 문제가 있다고 여겼다. 묵은 것이 새것보다 좋다고 말한 예수의 말씀에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필사자들은 여러 사본에서 마지막 문장을 삭제해버렸다. 그 결과 예수는 새것보다 좋은 묵은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예수의 구전에 따른 변개= 때로 필사자들은 예수에 대한 구전의 영향으로 본문을 변경시킨 경우도 있다. 예수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병자를 치유하는 요한복음 5장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베데스다 연못은 직사각형으로 된 길이 100m, 너비 60m 정도의 크기였다. 이 연못의 네 변은 회랑으로 둘러졌으며 연못 가운데에는 또하나의 회랑이 가로질러 있었다. 이 연못은 빗물을 모아놓은 저수지 같은 것이었으나 바닥 깊은 곳에서는 샘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이곳에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등 수많은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예수는 이들 중에서 38년이나 그곳에 있으면서 병 낫기를 소원하는 한 사람을 택한다. 그리고 그에게 "낫고자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병자는 자기를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물이 움직일 때에' 다른 사람이 항상 자기보다 먼저 들어간다고 대답한다. 이 말 속에는 '물이 움직일 때에' 연못에 들어가야 병이 낫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자신은 지금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문제는 현존하는 오래된 우수한 사본들에는 이 병자가 왜 물이 움직일 때 연못에 들어가려고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리고 물은 왜 움직이는지에 대한 설명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 필사자들은 3∼4절을 첨가해 이 부분에 대한 '의문의 답'을 보충하고 있다. 후기 사본들에 보면 바로 이런 설명이 첨가된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천사가 물을 움직이고 물이 움직일 때에 들어가면 병이 낫게 된다는 뜻이다. 참으로 흥미진진한 훌륭한 가필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성경에는 첨가된 부분을 괄호로 묶어 처리하고 있다.


◇조화 의도에 따른 변개=필사자들은 복음서의 구절들과 조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변개한 경우도 종종 나타난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 시절이나, 지금이나 기독교인들에게 친숙한 구절은 역시 주기도문이다. 그러다보니 누가복음의 주기도문보다 마태복음에 장황하게 소개된 주기도문을 더 선호하게 됐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너무 짧아 잘려나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11:2∼4)


마태복음 6장 9∼13절의 단락을 통해 주기도문을 알게 된 필사자들은 바로 이 내용을 누가복음에도 첨가해 누가복음의 짧은 주기도문을 해결했다. 그러나 우수한 여러 사본들은 이런 필사자들의 유혹을 거부하고 누가복음의 짧은 주기도문을 그대로 싣고 있다. 우리의 성경도 이 사본을 따르고 있다.


“묵은 포도주가 더 좋다”는 예수 말씀 없애

 

신약성서는 AD 1세기부터 16세기까지 1500여년에 걸쳐 끊임없이 필사가 거듭돼 왔다. AD 367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신약성서 27권이 맨 처음 정경으로 발표됐던 비슷한 시기에도 교회 공동체에서는 외경으로 불리는 '헤르마스의 목자' '바나바 서신' 등이 권위있는 문서로 회람됐다. 그후에도 정경은 깔끔하게 통일되지 않다가 서방교회에서는 5세기, 동방교회에서는 이보다 훨씬 후인 10세기쯤 비로소 정착됐다. 당시 동방교회 교부들은 대표적인 묵시 문학인 요한계시록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때서야 정경 목록에 추가시켰다.


세월은 더 흘러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 최초의 인쇄본 성서가 세상에 선을 보인다. 1516년 네덜란드 인문주의 학자였던 에라스무스가 바젤에서 준비했던 다름아닌 그리스어 성서가 바로 그것이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필사자의 사본에 의존, 성서를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한 필사자가 성서 한권을 필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아무리 빨라도 수개월을 넘겨야 가능했다. 이것이 관전 포인트다.


1500여년 동안 숱한 필사자가 사본을 베끼면서 과연 우발적인 실수만 저질렀을까? 다양한 사본을 비교해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의도적인 변개(변경)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필사자의 의도적인 변개로 형성된 문맥이 상당히 매끄럽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가장 근접한 형태의 원본문을 찾고자 노력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열띤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논쟁의 대열에 참여한 학자들은 본문이 필사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변개됐다는 데는 동의한다. 다만 어느것이 원본문에 가까운 것인가에 대해서만 이견이 있을 뿐이다. 이문(異文)과 원본문인지를 찾아나설 때, 성서에 대한 '막연한 신뢰'에서 벗어나 '사활적 신뢰'로 바뀔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본을 따라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은 성서의 폭넓은 이해와 깊은 믿음을 동시에 추구하는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