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예술

도서_미술3

스카이7 2024. 12. 7. 23:14

[현대미술 이야기]

포멀리즘은 회화에서 오직 '폼(Form)'만이 중요
 그림에서 소재, 문학적 설명 같은 비회화적 요소를 싹 걷어낸 색, 형상, 선, 구도, 질감...으로 이루어진 순수한 시각적 요소들이다.
 시각주의 또는 조형절대주의.
  '미술의 순수성'과 포멀리즘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의심하는 주체인 나, 바로 그 자아(Ego)가 세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 즉, 데카르트의 이 명제는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나는"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성의 주체인 나 - '자아'가 모더니즘의 기둥이다. 모더니즘의 큰 흐름은 자연스럽게 자아를 표현하고 주장하는 것이 되었다.

넓게 보면 인상주의 이후 모더니즘 시대 전반에 걸쳐 미메시스가 후퇴하고 자아를 주장하는 표현주의가 전진하였다. 모던 시대의 모든 미술이 표현주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세상을 그리지 않았다. 세상을 빌어 자기 자신을 그린 것이다.

고흐나 로스코나 자신의 작품은 곧 자신의 영혼, 자아라고 생각했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작품은 경건한 그 무엇이었다. 두 화가는 영혼을 소진한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지극히 모더니스트스러운 결말이었다.

 종이 상자로 된 상품 브릴로 박스와 완전히 똑같아 보이는 작품을 만들었다면 즉, 시각적 체험이 동일하다면 포말리즘의 이론에 따라 상품 브릴로 박스와 작품 브릴로 박스의 미술적 가치는 똑같은 것인가?

원본(original)과 재현(representation) 사이에는 위계질서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원본은 한낱 공산품일 뿐이다. 위계질서가 무너졌다. 흔하디 흔한 공산품을 정성스럽게 재현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 공산품을 그대로 복제하는 식의 재현이 미술이 될 수 있는 것인가?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즘(표현주의)과 포스트모더니즘(탈표현주의)의 경계에서 연결핀의 역할을 했다.

표현주의적 작가주의를 제거하고 포말리즘만 남긴 미니멀리즘에서는 작가의 체취가 사라지고 물체 (object)가 느껴진다.

개념미술: 아이디어와 개념이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시각적으로 어떻게 보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순수성이라는 거대담론이 사라지자 장르의 경계가 급속히 허물어졌다. 전위적인 해프닝과 퍼포먼스가 미술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시각적 아름다움에 천착하던 미술의 경계를 뛰어넘어 개념의 영역까지 미술의 다양성을 넓힘
 
현대미술은 왜 불편한 것일까? 
-해설 없이 감상할 수 없는 미술
-철학의 과잉, 미술의 부재
-엘리트주의로 복귀한 현대미술
 -잘 그리지 않아도 되는 미술 (代작의 관행)

모던 이후 현대미술의 위대함은 다양성의 수용에 있었다.
종교적 도그마에서 해방되고 미메시스에서 해방된 미술은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에서 마저 해방되었다. 그래서 현대미술의 다양성이 폭발할 수 있었음.

미메시스와 아름다움의 강박보다 더 억압적인 힘에 의해 현대적 클리셰를 양산하고 있지는 않은가?
브랜드를 앞세운 카르텔 앞에 줄을 서느라 다양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 아닐까?
현대자본주의의 커머셜리즘이 만유인력처럼 모든 것의 중심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 아닐까? ♥


[새롭게 읽는 서양미술사]

신석기 (이집트)  중세   현대    추상
구석기   그리스          사실 real           

 이집트는 중왕국이 되면서 멤피스에서 테베로 수도를 이전합니다. 테베의 사제와 귀족들은 최고 신인 태양신 라 대신 테베의 지역 신인 아몬Amon을 주신(主神)으로 믿었고, 막대한 권력과 부를 누렸습니다. 

아케나톤은 파라오에 즉위하자 곧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그는 사제와 귀족들이 믿는 아몬신과 여러 잡다한 신들을 정리하고, 태양 그 자체가 신이 된 아톤aton을 유일신으로 추앙하며 유일신 사상을 도입했 습니다. 이때 이집트에서는 최초로 유일신 신앙이 생겨납니다.

아케나톤 왕은 종교개혁을 통해 기존의 사제와 귀족들의 힘을 눌렀고, 유일신 사상을 중심으로 흩어진 왕의 권력을 중앙집권화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이제 하늘에서는 아톤신이, 지상에서는 아케나톤 왕이 절대권력자가 되었습니다. 하늘에는 유일신이 있었기에 이제 왕은 지상에서 최고권력자로 활동합니다.  왕은 이제 보편적인 존재로서의 파라오가 아닌 아케나톤이라는 유일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드러냅니다.

 고대 이집트시대의 세계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는 정지된 세계와 운동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정지된 세계는 지배자들의 세계(정면성 추상성)이며, 운동하는 세계는 피지배자들의 세계(변화 순간)입니다.

3000넌전~17세기 정지와 운동구분
19세기 변화 운동의 자유로운세계

 구석기미술의 들소는 한 마리의 특수하고 개별적인 들소입니다. 즉 들소의 일반 개념이 아님.
 신석기인들은 들소의 일반 개념을 추상적으로 표현해 기호화했습니다. 반면 그리스 조각의 인간은 인간 일반, 즉 개념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개성이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주로 올림피아 경기에서 우승한 사람, 사회적 영웅, 신을 조각했습니다. 이 조각 들은 완벽한 인간의 전형을 보여줄 뿐 그것이 실물과 얼마나 닮았는 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공장소에 세워두었지요.

 뛰어난 능력을 지닌 개인은 오히려 공동체에 위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개인이 인기를 얻어 권력을 형성하고,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리스 조각은 주로 신이나 영웅을 묘사하지만 뚜렷한 개성을 지 우고 최대한 이상적인 모습만 부각합니다.  본격적으로 조각에서 개성이 드러나는 것은 로마 시대입니다. 공동체 보다 능력있는 개인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투쟁하던 시대였지요.
그리스미술 형식과 내용의 일치  완성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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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조각이  '나는 누구인가'를 사유하고 있다면, [헬레니즘] 조각은 외부세계와 함께 운동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뇌하고 있습니다. 이상적인 삶, 덕(德), 명예, 공동체의 목표에 대해 생각하던 그리스 도시국가의 시민들은 헬레니즘시대가 되면서 고민의 방향성 을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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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힘의 논리로 돌아가고, 제국의 시민들은 명예나 덕이 아닌 (경제적) 이해관계로 묶입니다. 제국은 정복 전쟁을 통해 끊임없이 영토를 넓혀가고 이질적인 문화, 언어, 민족은 한데 뒤섞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입니다.  이제 '(정지된) 존재'보다 '운동(사건)'이 더 중요해집니다.  
17세기 바로크에서도 반복
도시국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거쳐 절대왕정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노골적인 힘의 세계, 철저한 현실의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승리자는 패배자의 모습을 멋지 게 조각해서 자신들의 우월함을 확인했습니다. 마치 돈 많은 지주가 밭에서 일하는 농민들을 등장시킨 목가적인 풍경화를 거실에 걸어두는 것과 비슷하지요. 승리자는 패배자를 통해 자신의 현재 위치, 우월함을 재발견합니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우선인 사회에서는 전통과 규범보다는 현실과 감각적 경험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리스 조각에 비해 헬레니즘 조각은 표현에 있어 더욱 역동적이고, 노골적이며, 다양한 주제를 채택합니다. 
이후 로마시대에는 현실을 중시하고 감각적 경험을 추구하는 것과 더불어 '실용'이 추가됩니다. 제국을 움직이는 것은 꿈과 이상이 아닌 철저한 힘의 논리입니다.  이제 실용이 사회적으로 미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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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인들에게 예술은 고상하거 나 고고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예술이란 기록의 수단이며, 홀륭한 교육자료였고, 집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도구였습니다. 로마에서 실용성과 분리된 예술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제국이 원하는 예술은 이처럼 생활밀착형 예술이었습니다.

그리스 사회는 작은 도시국가였고, 아테네는 직접민주주의를 실시 하던 나라였습니다. 누가 누구인지 다 알고, 사는 게 비슷했던 도시국 가가 가장 경계했던 것은 절대권력을 가진 개인의 출현이었습니다. 그리스 조각이 개인의 개성을 배제하고, 실존 인물의 조각은 사후에 제작했다는 것은 능력이 뛰어난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결속을 더 중 시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미술에서 모든 인간은 이상화된 보편적 존재로서 등장하게 됩니다.
반면 로마 조각에서는 거침없이 개인과 개성이 드러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과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은 '보편성'이라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페르시아 전쟁을 표현하기 위해 신화 속 전쟁 장면을 가져왔다는 것은 그리스인들이 특수성보다는 보편성을 추구했 다는 걸 말해줍니다. 신화 속 전쟁은 현실의 모든 전쟁을 대변할 수 있습니다. 오랜 기간 인간의 행동이 축적되어 형성된 신화는 보편성 과 전형성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개별적인 전쟁은 신화화되어 이제 역사 속에 영원히 남게 됩니다. 사람들은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 을 보면서 자신들의 특수한 서사를 신화 속 서사로 독해합니다. 그러자 개별성과 특수성은 사라지고, 시공간을 초월한 현재성이 그 자리 를 차지합니다.

로마미술과 중세미술은 왜 연속서술 형식을 도입했을까요? 연속서술의 가장 큰 장점은 서술을 따라가기만 하면 누구나 이야기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글자를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로마에서는 황제의 업적을 알리고 전쟁을 기록해야 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글을 모르는 민중에게 종교적 내용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이럴 때 미술이야말로 최고의 교육 및 홍보수단이 됩니다. 기독교가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이 미술을 장려했 던 이유입니다.

연속서술에서는 얼마나 이야기를 자세하고 상세하게 전달하는지 가 중요합니다.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뉘앙스는 가장 먼저 버려야 합 니다. 그건 친절하지 않을뿐더러 오해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물을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하는지도 일차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 니다. 더 중요한 것은 명확한 정보전달입니다. 시간, 현실, 경험을 중 시하는 경향은 실용적 태도를 부르고, 실용은 시가 아닌 이야기(소설) 를 데려옵니다. 로마미술이 그랬고, 중세미술도 어느 정도 이러한 경향을 띱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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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인들은 유리, 보석, 상아 등 반짝이는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해서 휘황찬란한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빛은 곧 신의 속성이 유출된 것으로, 우리는 그 빛을 흡수해 다시 신의 세계로 돌아가는 경험을 하게 되지요. 중세교회는 단순 관람이 아닌 체험으로서의 장소입니다.

중세미술이 보여주는 특징은 물질적이고 가변적인 세계, 즉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는 관련이 거의 없습니다. 주제, 표현, 재료 등 미술을 이루는 모든 요소는 비물질적이고, 추상적이며, 정신적인 세계를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은 이집트미술과 중세미술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그 기저에는 둘 다 현세가 아닌 내세, 물질이 아닌 정신(또는 영혼), 순간이 아닌 영원을 지향하는 세계관이 깔려 있습니다. 여기서 미술은 삶에서 보이는 감각적인 다채로움을 지워버리고 변하지 않는 본질과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신비로움에 집중합니다. 구상이 아닌 추상을 선택합니다.

인간을 초월하는 권력은 미술에서 어김없이 정면성을 불러옵니다.
이집트에서 파라오를 묘사했던 방식이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흉상 에서도 이런 강력한 정면성이 등장합니다.
입구에서 심판자 예수와 맞닥뜨리고 뜨끔한 마음을 지닌 방문객은 이제 어두컴컴한 성당 내부로 들어갑니다. 속세의 모든 감각을 내려놓고 그 앞으로 다 가갑니다. 보이는 것은 오직 정신의 빛뿐입니다.

'고딕'은 이러한 중세 후기의 사회상을 드러내는 예술입니다. 같은 중세이지만 중세 11세기 이전과 이후의 중세는 같은 세상이 아닙니다. 교역이 활발해지고 화폐경제와 도시가 발전했으며 자유로운 도시 민이 등장했습니다. 정치와 문화를 독점하던 종교는 상대적으로 느슨해졌고, 사람들은 성직자의 말씀보다 자신의 감각과 경험을 더 신뢰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세계관의 변화를 동반하기 마련입니다.

 중세 후기를 대표하는 고딕 양식을 살펴보면 중세의 달라진 세계관과 중세 후기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정신의 빛, 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속세의 감각을 통제해야 합니다.  내면에 집중해 정신을 통해 신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로마네스크는 '인간은 얼마든지 정신(또는 이 성)을 통해 신을 만날 수 있다'는 주장의 건축적 표현입니다.

초기 기독교 철학은 그리스 철학을 만나 실재론적 입장을 취합니 다. 실재론이란 '실재(진리, 보편 개념, 이데아, 신)'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실재론은 개별자를 뛰어넘는 보편적 개념, 본질이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임

보편적 존재로서의 신을 뜻합니다. 즉 신이라는 객관적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지요. 실재론에서 말하는 이성이란 이렇듯 "추상적 사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래서 중세 초·중기에는 종교기관과 성직자의 권력이 막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보편적·객관적 존재로서의 신(즉 신의 개념, 본질)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성직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감각을 통제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서도 계급이 높은 교황, 대주교, 주교 순으로 신을 더 잘 아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계급이 높다는 것은 더 많은 공부와 수행을 했다는 뜻이고, 그만큼 신에 대해 잘 안다는 뜻이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일반 신도들은 무조건 성직자의 말을 믿고 따르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철학자들은 플라톤 을 채택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버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형상(진리, 개념, 본질)은 각 사물 안에 내재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천상의 세계를 가정하는 중세인들의 입장과 대치되는 내용이 었습니다.   중세 초기에는 버려졌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세 후기에 다시 유럽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신'이라 고 하면 그건 그냥 이름, 단어, 발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신이라는 이름만 같을 뿐, 각자가 느끼는 신은 다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신을 구성하는 각종 의미는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해석하는 사람에게서 구성됩니다. '신'이라는 단어와 나의 경험, 감각이 결합해 신의 의미가 만들어집니다.  각자 자신만의 신이지요. 즉 세상은 나의 경험에 의해 구성됩니다.
  중세 후기는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신앙을 요구했습니다. 세속권력 과 도시가 발달하면서 진리나 말씀보다는 감각과 경험이 중시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성직자들만이 독점하는 종교에서 모두에게 개방된 평 등한 종교를 원했습니다. 

 고딕 성당은 심지어 글을 모르는 까막눈에게도 모두에게 열려 있 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누구나 붕 뜨는 느낌을 받습니다. 누구나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찬란한 빛에 감탄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천장과 뻥 뚫린 공간을 메우는 신비로운 빛은 그 누가 되었든 모두에게 천국을 경험하게 해줍니다.
 감각은 교육도 훈련도 필요 없습니다.  철학에서는 평등과 경험을, 예술에서는 색채를 불러옵니다.

고딕 성당이 '색'을 택한 것은 바로 '감각-평등-미술에서의 색'이 라는 공식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미술에서의 색은 감각을 나타냅니 다. 선(線)이 사물의 형태와 이야기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면, 색(色)은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역할을 합니다.

중세를 지나며 종교는 점점 타락했습니다. 신은 지상을 떠난 지 오 래고, 신의 말씀을 빙자한 인간의 불완전한 해석이 세속을 지배했습 니다. 기존 종교 권력에게 하늘과 땅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교회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반면 종교의 정화를 원하는 세력들은 불완전한 인간이 전능한 신의 말씀, 의지, 목적 따위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못 박아버립니다. 

예수 수난 장면이 미술작품의 주제가 되었다는 것은 결국 세계관 이 바뀌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상처 입은 예수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감성적으로 다가오며, 지상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애환을 달래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 저렇게 고난을 겪으셨는데 나의 고통쯤 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동시에 예수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지성적이고 귀족적이었던 종교는 이제 감성적이고 대중적인 종교로 나아갑니다.

325년 로마시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참여한 니케아 공의회 ecumenical council (소議會)에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라 는 삼위일체설이 채택됩니다. 반면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하던 아리우스파의 주장은 이단으로 판정되어 교회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로마 교회에서 추방된 주장을 믿었던 것은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게르만족이었습니다. 로마와 르네상스 이탈리아 사람들이 야만인이라 고 불렀던, 동시에 고딕이라 불릴 현대적 양식 Opus Modernum을 창안했던 고트족이지요. 이들은 아리우스파의 신앙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트족의 신앙은 중세 후기의 감각과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중세 후기 미술작품에서 예수는 인간을 초월한 신이 아닌 육체적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한 명의 개별자가 됩니다. 그가 받았던 고통은 감각을 통해 나의 몸 안으로 들어옵니다. 중세가 지나갑니다.

전능한 신은 이 세상을 창조했을뿐더러 시공간을 초월합니다. 그는 세상을 창조한 자로서 과거, 현재, 미래를, 또 동쪽과 서쪽을 동시에 봅니다. 덩달아 비물질적 존재인 천사와 물질적 존재인 인간을 동시에 봅니다. 신은 모든 것을 동시에 볼 수 있기에 그 시각은 분산적이 고 확산적입니다.

반면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은 세상을 바라볼 때 한 번에 하나의 사물, 광경, 장면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한곳을 응시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 습니다.  인간은 세상을 하나의 장면으로 종합해서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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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본주의에서 말하는 전인적 인간이란 감각과 감성에 휘둘리는 인간이 아닌, 냉철한 지성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인간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등장하는 미술이 곧 고전주의라 불리는 그리스미술과 르네상스입니다.
 지성, 합리성, 논리의 특징이 변화무쌍한 물질, 감각, 감성을 배제함.

 우리가 말하는 '인간미'에는 감성적인 부분이 상당히 포함되니 이런 요소가 제거될수록 인간은 똑똑할지언정 차갑게 보입니다. 르네상스에서는 신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왔습니다. 이때의 인간이란  진·선·미와 지·덕·체를 두루두루 겸비한 완전하고 모범적이 며 이상적인 인간입니다.

 중세에는 신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했 다면, 르네상스에서는 이상적인 인간을 목표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지금 내가 겪는 실존(경험, 감각)보다 본질(정답, 개념)이 중요합니다. 사물의 목적이 이미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고대, 중세, 르네상스는 목적론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르네상스시대에 와서 미와 사랑의 여신은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을 신(정신, 지혜)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존재로 격상됩니다. 비너스를 그리는 것은 단지 아름다운 여인의 누드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 었습니다. 아름다운 육체는 그보다 더 높은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우리의 영혼을 상승시켜줍니다. 그 최종지점에는 지혜와 신이 있는 것 이지요. 중세에 잊힌 물질과 감각에 대한 욕망이 신에 대한 사랑과 만나 비너스를 복권시켰습니다.

르네상스는 중세를 벗어나 인간 지성이 개화한 시대였고, 개화한 지성은 미술에서 수학적·논리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감성적 공감이 아닌 냉철한 지성은 개념을 만들기 위해 일차적으로 나와 세상을 구분하고, 나는 세상을 분석하는 입장이 됩니다. 이러한 태도는 미술을 관조적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르네상스를 보면서 감성적으로 공감하기보다 관조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감정을 절제하고, 명상에 잠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때 느껴지는 초연하고 차가운 아름다움이 바로 지성이 지닌 아름다움입니다. 르네상스는 지성의 아름다움을 시각화했 습니다. 지성이야말로 신과 인간, 동물과 인간을 구분해주는 가장 커다란 차이점입니다.

알프스 이북 지역의 중세 봉건제와 종교는 여전히 미술에서 파편 적·분산적 공간이라는 중세적 시각을 유지하게 했습니다. 그들의 세 계관은 알프스 이남의 변화처럼 급진적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시장과 도시는 말씀보다 경험을 중시합니다. 그러니 우선 내 앞에 펼쳐진 것들을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사물을 보는 섬세한 관찰력은 미술에서 개별 사물의 세밀한 묘사에 반영되었습니다.

북유럽 르네상스 작품을 보면 사실적인 듯하면서도 비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듯하면서도 비현실적인 느낌을 전달합니다. 화면은 반대되는 두 성질을 동시에 담고 있기에 이질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북유럽미술이 주는 오묘함의 근원은 바로 정치, 경제, 종교의 이질성에서 발생하는 북유럽인들의 시각이었습니다. 북유럽인들의 이런 시각은 미술에서 비논리적인 공간 구성과 사실적인 사물 표현으로 드러났습니다.

신에게서 독립한 인간이 이제는 홀로 자연을 탐구하게 되었습니 다. 인간은 광활한 우주앞에서 고독함과 함께 세상을 완벽히 분석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절망을 동시에 느꼈을 것입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감성이 우울로 나타났고, 특히나 창조 행위를 하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서 우울한 정서가 많이 보입니다.

천사 주변의 사물들은 혼란스러운 세상을 질서 있는 우주로 만드는 데 필요한 도구들입니다. 천사는 연구를 하다 꼴딱 밤을 새우고 아침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우주의 질서를 밝히기 위해 분투하는 르네상스인 같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뒤러의 <멜랑콜리아> 는 르네상스 지식인의 초상이면서 창조하는 자의 비애를 대표하는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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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매너리즘 작품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신비로움' 입니다. 르네상스에서 느끼는 감정이란 일종의 경외감, 존경심에 가깝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화면 속에 가장 이상적인 인물이 가장 이상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르네상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매너리즘미술에서는 신비로움과 몽환성을 느끼게 됩니다. 즉 매너리즘은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지요. 매너리즘은 인간의 지성보다 감성에 더 맞닿아 있습니다.

 매너리즘의 배경이 되는 16세기는 세 계관이 충돌하던 시대였습니다. 결국 매너리즘이 보여주는 불안함, 불안정, 우울, 환상은 기교와 표현의 문제가 아닌 앞서 본 바와 같이 흔들리고 불안한 시대적 배경이 만들어낸 인간의 반응입니다.

16세기가 지나면서 세계는 실질적 힘을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합니다. 국가와 종교, 합리와 미신, 노골적 힘과 이상적 세계가 대립하며 기존의 세계관을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관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거인으로 변한 풍차와 싸웠던 중세 기사 돈키호테는 매너리즘 시대 인물들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보여줍니다. 상업자본주의와 국가의 성장 앞에 봉건제의 산물인 기사는 점점 필요 없는 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아직 새로운 세계가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돈키호테는 자신이 기사임을 의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돈키호테의 행동이 어딘가 웃기게 보이는 것은 그가 시대착오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건 돈키호테의 잘못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고중세와 근대 사이에 끼어 있는 16세기가, 그 시대의 세계관이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너리즘 화가들도 이와 같습니다. 그림의 주제는 여전히 성모와 예수, 왕과 귀족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제보다는 표현이 먼저 눈에 들어와 신비로운 분위기에 압도됩니다. 인물들은 길고 호리호리하게 표현되며, 안정적으로 지상에 뿌리내리기보단 무게감을 잃고 부유하는 듯 보입니다. 현실과 환상은 때때로 하나의 화면에 중첩되는데, 이것은 곧 이성과 비이성이 서로를 간섭 하는 현상을 보여줍니다.

매너리즘은 르네상스미술에 비해 훨씬 현대적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주제에 얽매이지 않는 독특한 표현에 있습니다. 의미가 흔들리면서 화가들은 각자의 내면과 감성에 집중했고, 이것은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 강렬한 개성으로 발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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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미술은 혼란스러웠던 매너리즘을 거쳐 카라바조가 제시한 방향으로 나아갈 예정입 니다. 이들은 모두 운동하는 세계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근대입 니다.

바로크라는 명칭을 붙인 사람들은 진주가 찌그러진 곳만을 불만스
럽게 보았습니다.  바로크는 이상보다 현실을 보려고 했던 미술입니다. 이론에 비해 현실은 불규칙하고 무질서합니다. 하지만 이 말을 바꿔서 생각 해보면 그만큼 현실은 다채롭고 역동적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일그러진 진주가 선사하는 아름다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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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8년 지중해 동부에서 오스만 함대와 유럽 연합함대가 격돌해 오스만 제국이 승리하면서 지중해는 오스만 제국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매너리즘은 권력 공간의 이동과 세계관의 균열에 따른 불안과 우울을 보여주었습니다. 찬란한 전통을 지닌 이탈리아에서 혼란과 불안이 극심하게 드러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실상 1580년부터 이탈리아 경제는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중해가 막혀버리면서 주력 산 업이었던 모직업과 조선업이 붕괴합니다. 

프랑스 아카데미는 예술 교육기관을 넘어 예술가들에게 일거리를 주고 예술 이론을 토론하는 등 예술과 관련된 모든 일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말은 절대왕정시대 프랑스 예술가들은 아카데미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일도 할 수 없었다는 뜻이지요. 절대권력인 왕이 통치 하는 만큼 모든 기관과 분야는 왕의 통치방식에 따라 엄격하게 위계화·서열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아카데미에서 지향하는 아름다움의 기준 또한 확고했습니 다. 바로 '고전주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전주의는 그리스와 르네상스의 전례를 따르며 명확한 비례와 형태를 준수하고 소묘를 중시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주제 면에서는 당연히 이상적인 인물이 등장하 는 역사화(역사, 신화, 종교를 주제로 하는 회화)가 최고의 장르가 됩니다. 

 프랑스 바로크는 무엇보다도 왕의 힘을 시각화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힘'이란 그 자체로 동적입니다. 정적인 고전주의만 으로는 부족하지요.

거울의 방 천장화에는 절대왕정의 권력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웅장한 파노라마가 펼쳐집니다. 그리스 신화 속 온갖 신들이 등장하고, 절대왕은 로마 영웅처럼 표현되었습니다. 태양왕은 황금빛 갑옷을 입 고 진두지휘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세상 만물이 루이 14세 를 보좌하고 있습니다. 선(線)과 색은 싸우듯이 서로를 넘나들고 있으 나 소묘의 정확성 못지않게 색채의 역동성이 두드러집니다. 바로크의 특징이지요.

 회화는 절대왕을 선전하고 궁정을 장식하는 도구였습니다. 종교의 권력이 막강 했던 중세처럼 절대왕정에서도 모든 예술은 건축에 부속될 뿐입니다. 강력한 권력은 각 부분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의 건축이란 바로 절대권력을 상징합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절대권력 그 자체입니다.

19세기 프랑스 화가들이 끈질기게 아카데미에 대항했던 것도 그만큼 아카데미의 전통과 권위가 대단했기 때문입니다. 억압이 심할수록 반대의 몸부림도 격렬하게 나타납니다.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 의, 후기인상주의 모두 아카데미가 지향하는 고전주의로부터 거리를 두거나 그것을 극복하며 탄생했습니다. 프랑스가 17세기 이후 서양 미술을 견인할 수 있었던 것은 국력의 성장도 있었지만 그만큼 견고한 전통과 모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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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왕이 지배하던 프랑스 절대왕정은 관료제와 상비군을 바탕으 로 효율적인 통치체제를 만들고 정복 전쟁을 통해 영토확장을 이루어냈습니다. 태양왕은 국가의 힘을 키우면서 귀족을 눌렀는데, 특이 하게도 총과 칼이 아닌 축제, 연회, 무도회를 만들고 귀족들에게 행사 참여와 여기에 맞는 복장, 예절, 형식을 요구했습니다. 귀족들은 온갖 궁정 이벤트에 참석하고 새로운 예의범절을 배우고 행사에 걸맞은 의상을 마련하기에 바빴고, 그럴수록 주머니는 얇아졌습니다.

1715년에 태양왕이 사망하자 많은 귀족들이 한숨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는 베르사유 궁전에 살지 않아도 되었고, 왕이 요구하 는 엄격한 일정, 예의범절에 응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베르사유를 떠나 원래 살던 고향으로, 파리로 돌아가 그곳에서 작은 베르사유를 만들었습니다. 작은 바로Baroque on Small Scale라고 불리는 '로코코'입니다.

'로코코'라는 단어는 자갈과 조개무늬 장식을 뜻하는 프랑스어 'rocaille (로카이유)'에서 나왔습니다. 당시 귀족과 부르주아는 자갈과 조개껍데기 문양을 실내장식으로 사용했습니다.

바로크는 왕과 교황을 위한 양식이었습니다. 절대왕정과 반종교개 혁 진영의 바로크는 권력을 시각화하기 위해 거대하고 웅장하며 화려한 시각장치를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기계론적 세계관의 영향으로 바로크는 변하지 않는 존재보다 운동을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절대왕은 르네상스의 권력자처럼 부동자세로 있기는커녕 구름을 타고 날아다 니고 바다와 땅을 지휘하는 신의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반면 로코코는 귀족과 부르주아의 양식입니다. 이제 절대왕은 사 라졌습니다. 로마에 있는 교황청도 예전만 못합니다. 세상을 주도하 는 건  귀족과 새롭게 떠오르는 신흥 부르주아인 시민계급입니다.
  귀족과  부르주아 휴식은 어딘가 덧없고 불안해 보입니다. 그들이 휴식을 취할 동안 한쪽에서는 여전히 지옥 같은 세상이 펼쳐졌기 때문입니 다. 결국 로코코는 18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쇠퇴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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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전주의능  철저하게 노골적으로 시대와 결탁한 모습. 혁명과 함께 태어나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쇠퇴한 혁명의 미술. 신고전주의는 '예술을 위한 예술(순수예술)'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예술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즉 시대와 밀착해 있고, 이념을 자신의 존재 근거로 삼는 예술이라는 말 이지요. 그러나 이념을 잃을 때 신고전주의는 키치kitsch가 됩니다.
(가치에 대한 철학적 고민 없이 만들어진 작품이나 물건)
 예: 21세기 서울 한복판에 중세시절 유럽의 궁전 같은 외관을 한 건물

 로마에서 최상위 시민층을 Classis라고 불렀습니다. Classis의 형용사에 해당하는 단어인 라틴어 Classicus(일류의, 최상의, 규범에 맞는)에서 영어 단어 Classic이 유래되었지요. 그래서 고전이라는 말에는 모범, 전범 (典範), 전형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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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 작품의 대부분 주제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입니다.
사실주의는 가치판단과 편견이 배제된 순수한 시각적 사실을 지향합 니다
실증주의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배제하기에 사물의 본질은 탐구 대상이 아닙니다. 본질이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진실이란 사물의 표면에서 끝나게 됩니다. 사물의 내부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곧바로 편견, 선입견이 작용할 터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것 너머를 그리는 것은 오만이며 망상입니다.

  시각적 사실이란 개념, 언어, 지성을 배제한 순수한 시각과 순수한 감각입니다. 그리고 시각을 주로 사용하는 회화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도 깨닫게 됩니다(물론 20세기 이후 현대미술은 다양한 감각을 활용하기에 시각예술에 가두기에는 한계가 있다). 회화는 개념, 언어, 이야기, 감성 이전에 2차원 평면에 선과 색으로 이루어진 사물입니다. 19세기 이후 미술이 왜 회화의 매체성, 물질성, 순수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쿠르베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주의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다. 오로지 이상을 거부하는 것일 뿐이다. " 쿠르베는 외면받아온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했을 따름입니다.
 '사실'의 속성'  인간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양하게 해석하는 존재입니다. 사실을 해석해 의미를 만들어야만 인간은 삶의 안정감과 굳건한 자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석에는 편견, 선입견, 이해관계가 반영되기도 합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주관 속에서 살아갑니다.

시민혁명과 다비드이후의 신고전주의는 더는 시대와 어울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혁명을 주도했던 부르주아와 지식인등의 특정 계층 을 대변했던 미술입니다. 신고전주의가 공화제적 이상을 전달하지만 그것은 부르주아 계층이 기존 귀족들과 차별을 두기 위한 전략이었고, 절도와 비장함이라는 분위기와 태도는 다분히 귀족적이었습니다.
다양한 계층, 나이, 성향이 뒤섞인 민중에게 일괄적으로 절도와 비장함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고전주의는 절제를 바탕으로 하나의 이상을 추구하는바, 다양성을 지우고 하나로 나아가려는 점에서 이미 내부에 독재적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20세기 이후 히틀러는 고전주의만이 진정한 예술이라고 믿어 나머지 미술을 퇴폐미술로 낙인.

  아카데미는 화가들에게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강요하며 다른 차원의 아름 다움을 억압했고, 관람자를 현실로부터 떼어놓았습니다. 이러한 작품을 미술에서는 사이비미술을 뜻하는 키치kitsch라고 부릅니다. 키치는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감추고 진짜인 척 행세합니다. 19세기 아카데미미술이 바로 전형적인 키치입니다.

그리스, 르네상스, 신고전주의가 예술로서 가치를 가지는 것은 각 예술이 현실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으며 각 시대의 세계관을 시각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는 인간 지성을 바탕으로 조화와 균형, 그리고 이것을 토대로한 민주주의 가치를 표현합니다. 르네상스는 상인 중심의 공화제를 바탕으로 전인적 인간을 시각화했습니다. 신고전주의 예술은 왕조사회를 벗어나 시민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시민들에게 요구되는 덕목과 이상을 전달했지요. 이처럼 가치란 현실 속에서 생겨 나며 현실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지 현실과 동떨어져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주아들은 과거의 동지였던 민중을 배반하고 귀족이 되고자 했으며, 무식한 민중과 자신들을 차별화하기 위해 고전주의를 필요로 했습니다. 19세기의 고전주의는 권력을 독점하려는 소수가 지향하는 가치였고, 사회는 이미 대중사회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제도권과 재야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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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후 인간은 플라톤이 말하는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성'보다 보들레르가 주장하는 '시간 속에서 영원성'을 찾고 그것을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플라톤과 보들레르가 주장하는 각기 다른 영원성은 결국 본질과 실존의 문제입니다. 시간을 뚫어버리는 본질과 달리 실존은 시간 속에서 형성됩니다. 시간을 초월하는 본질은 과거부터 이어져온 역사, 전통, 규범을 중시하고 그것이 미래에도 지속될 것입니다.

반면 실존은 개별자의 순간적인 모습이기에 각 실존은 나의 실존, 너의 실존, 어제의 실존, 오늘의 실존 모두 동등한 가치를 지닙니다.
그리고 그 실존은 그 자체로 유일무이하며 독립적이라 영원성 또한 각 순간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보들레르와 19세기 화가들은 예리한 감각을 통해 과거와 다른 자신의 시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영원성의 정의를 새롭게 내렸습니다. 즉 고전주의식의 시간을 초월하는 공간적 영원성이 아닌 순간적·실존적 영원성입니다.

세상은 고전주의가 보여주는 것처럼 질서정연하고 깨끗하고 정지된 곳이 아니었습니다. 인상주의자들이 보았을 때 그러한 세계야말로 거짓이고 기만이었습니다.
반면 인상주의자들이 발견한 현대의 진리는 변화와 차이였습니다. 아침에 본 세상과 밤에 본 세상은 분명히 다른 세상입니다. 빛이 변했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차마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선 자신을 속이는 일이며 진리를 외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은 솔직해지기로 했습니다. 그러므로 후대 사람인 우리가 인상주의에서 발견해야 할 것은 편안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라 진 리를 향해 과감히 걸어갔던 용기입니다.

회화란 이야기와 사물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며 형과 색을 통해 아름 다움을 창조하는 행위라고 인식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회화는 고전주의적 모방에서 벗어나 미술 본연의 요소인 형태와 색채를 추구하 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순수회화가 등장하려는 몸부림이 마네에게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개념으로 세상을 본다면 모든 수련은 단지 '수련'일 뿐이지만 감각으로 본다면 각각의 수련은 모두 다르며 시간의 변화에 따라 이 세상도 달리 보인다는 것을. 정지해 있는 것은 없으며 세계는 탄생 이래로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야 말로 진실이라는 것을.

관람자는 그림을 통해 대도시와 현대인을 둘러싼 고립과 소외를 경험하게 됩니다. 신민(民)이 시민이 되면서 개인들은 생명, 재산, 이동의 자유를 얻었지만 고독과 소외 또한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드가가 보여주는 19세기 대도시 풍경은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속에 살아 가는 21세기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인상주의가 다른 사조에 비해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21세기가 근대 위에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드가는 19세기 후반 파리의 일상을 그린 화가이지만 그의 그림은 단순한 풍속 그 너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상의 장면을 우연히 포착한 것 같지만 화가는 작품의 작은 부분까지 세세하게 계획하고 의도해 '우연적 장면'을 '연출'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보들레르의 말처럼 '일시적인 것, 덧없는 것, 우연한 것'이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으로 승화됩니다.

 신분사회에서는 모든 사물에 고유의 목적이 있었지만, 시민사회의 개인은 자신의 본질이나 삶의 목적을 모른 채 태어납니다.  드가는 예리한 감각과 철저한 계획 을 통해 현대적 삶의 우연적이고 공허한 속성을 보여줍니다.

드가는 찰나의 순간을 형태와 색채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의 시각은 현대 도시인의 시각 그 자체인데, 대도시에 사는 시민들은 모두 평범한 일상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어쩌면 드가는 일상과 우연 속에서 새로운 진리를 찾고자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새로운 진리란 순간과 우연속에 드러나며 스쳐 지나가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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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매 순간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답이 없으니 선택은 어려운 문제가 되고 인간은 늘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뭘 해야할지 명확하지 않으니 불안한 것입니다.

실존이 중요해진 상황에서 정답은 사라졌지만, 오히려 그래서 모든 것이 정답인 상황이 펼쳐집니다. 그러니 내가 추구하는 신념, 주장, 의지, 목적 모두가 정답이 되고, 나는 내가 중시하는 가치들을 선택하면서 미래로 나아갑니다. 삶에서도, 예술에서도 모방이 아닌 '창조'가 중요해집니다. 선택을 통해 나는 나의 미래를 창조해나갑니다.

왕조사회에서 시민사회로 나아가는 동안 철학적·사상적으로 실존주의가 대두합니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의 본질은 곧 개인의 실존입니다. 이제 모든 인간은 외부에서 자기 존재의 근거를 찾을게 아니라 자기가 자신을 어떻게 선택하고 규정하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고흐에게 사실이란 사물의 외형을 비집고 드러나는 실존이었습니다. 실존existence (實存)은 한 사물이 '구체적·실질적으로 그렇게 있음'을 뜻합니다. 실존은 본질과 반대됩니다. 본질은 가능성을 바탕으로 삶을 통해 그 가능성이 실현된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귀족은 고귀함 이란 본질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 고귀함을 실현하며 사는 것이 본질을 구현하며 사는 삶입니다. 고전주의 인물화는 고귀함, 순수함, 성실함 등과 같이 인물이 지니고 태어난 내재적 본질에 근거해 그것이 가장 이상적으로 발현된 상태를 보여줍니다.

반면 인상주의 인물화는 시시각각 변하는 빛 속에서 인물의 모습을 포착하려듭니다. 실증적 세계관 속에서 본질은 알 수 없기에 인상주의자들에게 본질이란 결국 변하는 빛 속에서 포착된 한순간일 뿐 입니다. 이것이 인상주의에서 모든 사물과 배경을 동등하게 처리하는 이유입니다. 인상주의는 고전주의가 말하는 정해진 본질을 인정하지 않기에 화면의 그 어느 것 하나도 독자적(입체적·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네나 모네의 작품을 보면 인물마저 배경처럼 다루어지고 있으며 사물들은 예외 없이 형태가 무너지고 색채속으로, 배경 속으로 스며들고 있습니다.

 후기인상 주의는 감각적 화면에 다시 의미를 부여합니다. 물론 이때의 의미는 고전주의처럼 일반 개념, 상식, 이야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것은 내면, 심상, 감성, 꿈과 같이 다분히 개인적·개별적·주관적 의미 입니다.

 고전주의 는 그림의 평면성을 최대한 가렸 습니다. 그것을 '눈속임'이라는 뜻의 '트롱프뢰유Trompe-l'uil'라고 합니다. 원근법이나 자연스러운 명암 처리 등 모두 눈속임을 위한 장치입니다. 르네상스 이후 고전주의는 최대한 눈을 속이는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즉 그림이 그림으로 보 이지 않게끔, 그림이 마치 실물처럼 보이게끔 했다는 뜻입니다. 그래 서 그림은 늘 실물(원본)의 재현(복사, 모방)이 됩니다. 따라서 모방물은 늘 실물에 종속되며, 실물(원본)보다 낮은 위치에 있게 됩니다.

고전주의에서 회화는 지성에 복종합니다. 여기서 지성이란 서사 (이야기), 의미, 개념, 상식을 포함합니다. <오송빌 백작부인>은 실존 인 물이었던 백작부인을 관람자에게 보여주기 위해 제작되었고, 이것이 그림의 일차적인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그림은 최대한 실물과 닮게 묘사되어야 합니다. 덩달아 품위, 고상함 등의 '백작부인'에 걸맞은 개념(본질)까지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고전주의는 눈에 보이는 사물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상징을 그림 속에 집어넣어서 개념(본질, 의미)을 전달합니다. 물론 이러한 의미 전달은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원근법을 배경으로 사물의 외관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소묘를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관람자는 화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을 오해없이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고전주의에서 그렇게도 소묘를 강조한 이유입니다. 소묘란 곧 지성(의미, 개념)과 연결됩니다.

반면 낭만주의 이후부터 개인의 감성과 내면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그림은 점점 외부 사물을 모방하는 단계를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감성과 내면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낭만주의 작품들을 보면 형태가 무너지고 색채가 강조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인상주의로 나아가면서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물론 인상주의는 시각적 사실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다 보니 형태가 무너지고 색채가 부각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인상주의도 개인적 시각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낭만주의 이후의 주관주의 미학을 따르고 있습니다.

인상주의에 와서 형태가 완전히 무너지는 상황이 발생하자 후기인 상주의 화가들은 다시 세계를 종합하고 통합하기를 열망하게 되었습 니다. 그들은 감각으로 무너진 화면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구조는 고전주의가 지향하던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구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후기인상주의자들은 사물에서 형과 색을 독립시켰습니다. 클루아조니슴은 사물(원본)로부터 형과 색을 해방하는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명확한 윤곽선으로 그림에서 형태와 색채가 먼저 보였던 것이지요. 그러자 외부 사물, 이야기, 개념, 의미를 재현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순수미술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미술은 순수미술을 표방하는 현대미술로 조금씩 나아가게 됩니다.

고전주의가 형태 위에 색을 입혔고, 인상주의가 색채로 세상을 표 현했다면, 세잔의 화면에는 단단한 색채 덩어리가 자리를 잡고 있습 니다. 세잔은 형태와 색채를 하나로 보았고 마찬가지로 소묘와 채색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데생과 색채는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전혀 아니네. 색채를 사용해 그리는 것이 곧 데생을 하는 것이야. 색채가 가장 풍부하게 될 때 형태도 역시 완성되지." 형태와 색채가 하나라는 세잔의 생각은 그를 고전주의와 인상주의를 넘어서게 해줍니다.

 채석장의 바위가 분명 입체와 깊이를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수학적 선원근법에 기초한 것이 아닌 색채 형태, 즉 감각에 기초한 깊이입니다. 감각적 깊이란 부피, 무게, 질감 등을 포 함하는 종합적인 양감에서 오는 깊이이며 이것이 결국 화면에서 원근과 입체를 형성하게 해줍니다. 이때 형성된 원근과 입체는 내가 지 성적·수학적으로 판단하기 이전의 것이며, 내 감각으로 들어온 사물의 형상이자 존재의 에너지입니다.

 세잔에게 그림이란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조화를 찾는 것이며 그것들을 새롭고 독창적 인 논리로 다시 배열하는 것" 이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독창적 논리란 화가 개인의 감각의 논리를 뜻하겠지요.

르네상스 이래로 시작된 회화의 방향은 후기인상주의에서 전혀 다른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세상을 지성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던 노력은 결국 실증적인 방향으로 나아갔고, 실증적인 방향 끝에 다다른 것은 감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감각 그 자체는 잡을 수도, 정지시킬 수도 없 는 것으로 끊임없는 운동만을 지속할 뿐입니다.

인상주의가 해체된 세상 앞에 선 화가들은 다시 세상을 종합하기 시 작했는데 그 방식은 과거와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고전주의처럼 수학적 이고 논리적으로, 즉 객관적이라고 인정받는 세상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자신만의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분투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흐와 고갱은 내면과 상상으로 나아갔지만 세잔은 인상주의를 정 면으로 뚫고 나가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세잔은 현실 속의 사물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한 결과 감각의 논리를 따라서 감각을 자신만의 질서와 법칙 속으로 집어넣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무질서하게 들어온 감각이 정리되면서 사물의 에너지가 드러났습니다. 화가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느끼게 해주는,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주는 존재 라는 것을 세잔은 증명해내고 있습니다.

감각, 질서, 법칙, 구성, 조화 등 세잔이 주장한 회화의 원리는 20세 기 이후 현대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줍니다. 현대미술은 세잔이 열어놓은 문을 과감하게 통과하면서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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