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시각예술과 음악, 그리고 역사]
음악은 표현적 예술 형식이나, 음악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할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만 존재해야 했다. 따라서 초기 시대 음악은 발전이 거의 없었다. 표현 예술로서의 음악은 권장되지 않았고, 쾌락을 위 한 음악은 교회 당국이 '처형'해야 할 일종의 죄였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에야 음악을 비 롯한 예술이 예배의 핵심 구성요소이자 종교의식의 필수가 되었고 기독교의 발전과 확산에 기여하 는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세속적 태도와 반대되는 '비세속적 철학'이 교회의 기본방침이었다. 중세 기독교는 물질적 평안을 약속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현생에서의 삶은, 누리는 것이 아니 라 견디어야 할 더럽고 추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즉 당대를 살아가는 것은 곧 가혹한 고통이었기에, 기독교인들은 종교와 구원의 희망에 오히려 집중할 수 있었다. 재물이 거의 없어야 악의 유혹을 받을 가능성이 적다고 믿었기 때문에, 중세 시대에는 가난이 미덕이었다. 부자가 천국에 갈 확률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는 것은 단순한 격언이 아니었으며, 이를 통해서도 훈계가 충분하 지 않으면 지옥을 항상 염두에 두도록 가르쳤다. 또한, 중세 교회는 믿음 있는 자를 방해하는 악마의 존재를 강조했다. 악마는 쾌락에 가까이 있을 때 특히 활개를 치므로, 인간은 쾌락에 이르는 모든 것 을 철저히 경계해야 했고, 따라서 믿음 있는 수 많은 자들은 마귀의 유혹을 피해 광야에서 은둔했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자연스럽게 부상한 것은 수도원 운동이다. 독실한 신자들끼리 함께 살며 일하 고 예배할 수 있도록 공동체를 만들었고, 과업과 예배하는 삶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하는 수도원 건물을 건설하였으며, 인간관계도 그 안에서 이루어졌다.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Councils of Nicaea)는 거의 500년 동안 예술가들을 속박해 왔던 종교 적 주제의 예술적 표현에 관한 규정을 제정했다. '종교적 장면의 본질은 예술가의 몫이 아니다. 그것 은 가톨릭교회와 종교적 전통이 정한 원칙에서 기인한다. 예술작품은 화가의 소유일 수 있으나, 작품을 어떻게 조직하고 배치하는지는 성직자의 몫이다.'
사회의 안전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신성한 진리의 수호자가 교회였기 때문에, 성직자가 예술가들이 무엇을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준을 알려주 는 것은 타당한 일이었다. 예술가에게 할당되는 소재와 주제도 한정되었지만, 그 신성한 주제를 묘사 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엄격한 규율에 묶여 있었다. 예를 들어, 십자가의 예수 오른쪽에는 성모 마리아 가 있어야 했고, 왼쪽에 성 요한이 있어야 했다. 군인은 예수의 왼쪽을 찌르고 있어야 했으며, 예수의 후광에는 신성함을 상징하는 십자가가 포함되어 있어야 했고, 성인들에게는 십자가가 없는 후광을 그려 넣어야 했다. 하나님, 예수, 천사, 사도들은 맨발로 그려졌으며, 성모 마리아나 성인의 발을 무엇인 가로 감싸지 않은 상태로 그리는 것은 이단 행위로 간주되었다. 성 베드로에게는 짧은 수염이 있었고 성 바울 은 항상 긴 수염을 가진 대머리로 표현되었다. 이처럼 중세 시대에는 예술적 자유나 상상력을 침해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규약이 말았다.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그리스 문명의 건물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을 비교하면 큰 차이가 느껴 진다. 그리스 건물은 열린 구조로, 땅에 우아하게 놓여 있어 평화와 안식이 느껴진다. 그리스인들은 신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그들의 필요를 충족했고, 돌아가는 길엔 신들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신전은 기능적으로는 신들이 사는 곳이지만, 동시에 그리스인들의 미적 감각도 충족시켰다. 반면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은 무겁고 어두우며, 물리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세상의 빛을 차단한다. 중세 사람들은 이 건물을 찾아 하나님을 묵상하고 삶의 가혹한 현실을 피해 안식을 얻었다. 대규모 모임을 위한 기능적인 건물이라는 점은 같지만, 그리스 신전과는 다른 디자인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 각각의 건축방식은 각 시대에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철학과 신념을 반영한다.
수도사들은 교회 정문을 성경 장면을 나타내는 조각으로 장식했는데, 이 때문에 교회 정문에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근원이 교회 안에 있음을 상기시켰다. 정면에 묘사 된 인물은 쇠 약하고 길쭉하며, 살아있다기보다는 천으로 덮인 해골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 같은 인간 형상의 왜곡은 두 가지 신념에서 근거한다. 첫째, 중세 사람들은 현세의 삶을 부정했기 때문에 인간을 현실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 섬세하고 살아있는 듯한 그리스 조각과 달리, 로마네스크 조각은 현실을 왜곡하여 영적인 개념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조각가와 건축가의 협업 때문이다. 인물 조각상은 건축 계획의 일부로, 종종 아치와 기둥을 받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기둥을 배치한 후 조각을 추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건축물 구조 설계에 따라 조각의 형태가 결정되었다.
인본주의(Humanism)은 고딕 시대에 시작되어 '다시 태어남(Rebirth)'을 의미하는 르네상스 (Renaissance) 시대에 꽃을 피웠다. 한편, 르네상스 정신은 그리스 문화와 정신으로의 회귀를 추구하 는 것에서 출발했으나, 세속적인 면과 함께 개성과 인격의 가치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리스와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는데, 그리스가 주로 이상적인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반면, 르네상스는 진정한 인간개성의 가치를 중시했으며, 이를 위해 개인의 성격, 정신, 신체, 사회적 관계, 종교, 경제적 조건, 정치적 지위 등 다양한 측면에 대한 흥미를 표현했다.
교회의 권위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모든 권위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으며, 교회나 국가의 지도력에 대한 의존이 아니라, 자신의 합리성에 자신감을 가지면서 결과적으로 개인주의적인 신념으로 눈을 돌렸다. 그 결과, 르네상스 시대에는 물질주의와 개인주의가 새로운 삶의 동기가 되었다. 부를 획득하는 것이 가치 있는 목표로 여겨졌고,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세상의 지혜와 세속적인 권력을 좇았다. 사람들은 종교보다 비즈니스와 과학, 그리고 정치를 꿈꾸기 시작했다.
단선율 성가 시편 외 대부분의 음악이 칼뱅주의 교회에서 배제되었다. 같은 이유에서 교회의 오르간도 제거되거나 사라졌다. 이런 교리는 스코틀랜드와 저지대의 교회에서 음악과 예술에 대한 후원이 부족했던 이유를 짐작케 한다. 반면, 루터교와 가톨릭교는 예술가들이 그들의 종교적 철학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도록 계속해서 지원하고 장려했다.
루이 15세의 프랑스 궁정에서는 그 변화의 정점을 찍었는데, 베르사유의 왕궁에는 프랑스의 가장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귀족들은 세금 징수원들이 서민들로부터 짜낸 부를 통 해 사치와 여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따라서 로코코 스타일의 예술과 음악은 자연스럽게 그 당시 궁정 의 가볍고 경박한 분위기를 반영했으며, 예술가들은 후원자들의 사랑스러운 변덕을 만족시켰다. 화가 나 조각가, 그리고 장식가들은 그들의 세련된 기호에 맞춰 감각적이고 매력적인 작품을 창작했다. 그 시대의 예술에서 드러나는 섬세하고 우아한 특징은 귀족들의 생활 방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과장된 듯 보이는 환경 속에서, 삶은 자주 예술을 닮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우아함, 품위, 세련미와 사랑은 그 시대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부와 쾌락, 권력 숭배는 종교적 숭배의 자리를 차지했고, 바로크 스타일의 깊이 있는 표현과 영적 가치는 점차 퇴색되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험담, 대화, 춤, 그 리고 유혹에 더 큰 관심을 가졌으며, 대규모 행사보다는 둘만의 사담을, 예배 음악보다는 춤음악을, 그리고 현실적인 그림보다는 감상적인 사랑의 표현한 그림을 선호했다. 로코코의 귀족 문화는 이 피상적인 삶의 방식을 중심으로 하였고, 이것은 부유한 계층에게만 특화되어 있었으며, 그 안에서는 큰 열정이나 진정한 즐거움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바흐 이후의 작곡가들은, 바로크 음악의 정교한 대위법적 특성이 그들이 활동하고 작업한 사회적 환경의 세련미를 표현하기는 너무 복잡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교양 있는 귀족 후원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작곡가들은 명확하고 풍부한 표현력을 통해 멜로디를 사용했으며, 이런 서정성은 그들의 예술에 호소력을 더했다.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18세기 작곡가들은 신고전주의 화가와 조각가들보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와 로마 음악이 어떤 소리를 가졌는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음악가들에게는 고전적인 이상을 표현할 정확한 모델이 없었다. 따라서 음악에서의 고전주의는, 시각예술처럼 초기 고전의 모델을 재작업 하는 차원이 아니라, 추상적인 이상이었다.
과거 예술사조의 변화를 살펴보면 르네상스는 중세에 대한 반응이었고,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에 대한 반응이었으며, 고전주의에 대한 반응은 인상주의였다. 즉, 현대 예술은 감성에 치우친 낭만주의와 기술 만능 시대에 대한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로 들어서자, 예술가들은 낭만주의의 감성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물질적 세계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예술가 분류. 첫 번째 유형은 '감각주의자'로, 예술적 관습을 무 너뜨리고 기성의 가치를 거부한다. 충격적인 주제와 기법으로 주목받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표현력 이 부족하고 진정성 역시 부족할 때도 있다.
두 번째 유형은 '실험주의자'이다. 혁신가가 되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고 사용하지 않았던 재료를 조합해 자신을 표현한다. 즉,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새로운 이론을 기반으로 예술을 시도한다. 이들은 예술에 진심일 수도 있지만, 간혹 통일성과 일관성이 미 흡한 경향이 있다. 혁신가들이 그런 것처럼, 실험주의자들도 시작한 일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경우 가 많다.
마지막 세 번째는 위 두 유형의 장점과 과거의 장점을 결합하여 새로운 예술로 승화한 훌륭한 예술가들이다. 이 유형은 실험주의나 감각주의보다 더 견고하고 뛰어나다.
20세 초 예술의 주요 원칙 중 첫 번째는, 과거와의 단절이다. 이것은 19세기 낭만주의를 거부한다 는 것을 의미했으며, 낭만주의 기법, 주제, 표현에 대한 반란을 뜻했다. 이 예술가들이 과거에 대한 어 떤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면, 주제보다 방법이 더 중요했던 고전적 이상에 대한 것이었다.
두 번째 원칙은 사실주의의 거부였다. 예술가들은 물리적 현실보다는 내부의 심리 상태나 추상적 패턴을 표현하고자 했다.
세 번째 원칙은 불필요한 장식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20세기의 새로운 모토(Moto)와 일맥상통 한다. 그 결과 단순함, 간결함, 때로는 잔인함을 표현하고자 했고, 추상 화가 많이 그려졌다. 즉, 즐거움을 추구하기보다는 당대를 직설적이고도 당당하게 반영하고자 했다.
이러한 몇 가지 공통된 원칙들을 고려할 때, 20세기 예술은 차갑고 지적이며 냉소적일 것으로 치부 될 수 있다. 물론 20세기 초반에는 그런 경향이 보였으나, 예술가들은 어느 순간부터 감정이 예술에 서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1930년경부터 일부 예술가들은 감상적 인 차원이 아니라 사람에게 영혼이 있고 심지어 기계도 인간의 손에 의해 조종되어야 한다는 인식 하 에 낭만주의 이상으로 되돌아갔다.
개념 예술은 예술적 개념이 "더 중요"하므로 물질적 현실을 거부하는 반면, 포토 리얼리즘은 섬뜩할 정도로 정확하게 물질적 현실을 재현한다. 한편, 포스트모더니즘은 건축과 순수 예술뿐만 아니라, 사회학, 철학 등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용어인데, 고 전 시대의 그리스 예술에서부터 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모두 포괄하는 절충적 성격 을 지니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즉흥적인 경향이 있었다. 시각 예술은 그들의 소재 배열에서 우연성의 요소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지만, 음악은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작곡가들은 우연적인 소리의 발생에 따라 음악의 일부 또는 전체 요소가 결정되는 무작위 음악을 광범위하게 실험했다. 전자 음향 발생기와 컴퓨터에 의해 생성된 새로운 소리뿐만 아니라 산업에서 생성된 새로운 소리는 작곡가들에게 다양한 음색 범위를 제공하였다.
한편, 20세기 예술에서는 여러 모순점이 존재한다. 한쪽에서는 체계적인 재료와 기법의 훈련이 주장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재료와 요소의 우연한 조합이 있다.
또 다른 모순점은 특히 20세 기 초기에는 예술에서 감정의 부인이 보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는 쏟아지는 감정의 쏟아지 는 표현으로의 전환이 되었다는 점이다. 후자는 대중 예술과 음악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며, 여기서는 완전한 감정 표현의 자유가 수용되었다.
예술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판단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지만, '변화'만큼 영구적인 것은 없다. 모든 매체의 예술가들은 우리 시대의 급격한 변화를 반영하려고 노력해 왔다. 20세기 후반 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오늘날 세상에서의 삶을 표현하는 예술적인 은유를 계속해서 탐구함으 로써 가능할 것이다. ♥
[영혼의 2중주]
오펜바흐 지옥의 오르페우스 중 지옥의 갤럽.
앤타일과 함께 연구를 진행하던 사람은 할리우드의 유명 여배우이 자 발명가였던 헤디 라마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잠수함이 피란민을 태운 영국 여객선에 어뢰를 발사하여 격침하는 사건을 접했다. 이때 어린이 70명을 포함하여 293명이 사망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녀 는 연합군을 도울 만한 연구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라마는 연합군의 잠수 함이 어뢰를 발사할 때 무선으로 어뢰를 조종하여 주파수를 분산함으로 써 적군이 이를 알아차릴 수 없게 하는 방안을 고안했다. 하지만 개발이 쉽지만은 않았던 라마는 어느 날 할리우드 파티에서 앤타일을 만나게 되 고 그가 작곡한 <기계적 발레>에서 그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기계적 발레>를 위해 엔타일은 피아놀라라 불리는 자동피아노를 사용했는데, 수많은 자동피아노를 동시에 연주하게 하기 위해 원통을 사 용한 경험을 바탕으로 '무선주파수 간 빠른 도약'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 다. 자동피아노란 '사람이 연주하는 대신에 기계의 작용에 의하여 자동적 으로 연주하는 피아노'를 일컫는다. 그리고 이들은 여든여덟 개의 피아노 건반과 마찬가지로 여든여덟 개의 주파수로 변조하는 장치를 만들어 특 허를 출원했다. 이후 이 기술은 무선전화 통신망, 와이파이, 블루투스 등 으로 발전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기계적 발레>는 원래 화가 페르낭 레제가 더들리 머피와 함께 제작 한 동명의 영화를 위해 작곡한 곡이다. 15분 남짓 진행되는 이 영화 속에 는 그네를 타는 여성, 기계와 같이 반복적으로 웃는 여자의 얼굴, 타자기, 움직이는 시계추, 앵무새, 놀이공원의 기계들, 자동차, 마네킹 다리, 모자,
뵈클린의 <자화상>에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해골이 등장한다. 해 골은 화가의 귀에 대고 음악을 속삭인다. 바이올린에는 줄이 하나밖에 없 다. 그것도 가장 낮은 G음을 내는 줄만이 남아 있다. 땅속 깊숙이 끌어내 리듯, 마지막 남은 그 한 줄은 인간의 영혼을 낮은 곳으로 인도하는 것 같 다. 그리고 뵈클린은 해골이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 다.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의 음악 소리를 들으며 그는 붓과 팔레트를 들 고 그림을 그리려 한다. 그가 그리려는 것은 한 가닥 남은 삶의 희망일까, 아니면 다가오는 죽음일까? 말러의 <교향곡 4번 G장조> 2악장은 뵈클 린의 이 그림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이다. 죽음이 춤을 추는 듯 표현하기 위해 말러는 바이올린 현의 음정을 조절하는 변칙적 조현법인 스코르다투라 scordatura를 사용했다. 독일의 작곡가 막스 레거는 <아 르놀트 뵈클린에 의한 네 개의 교향시>를 썼고, 라흐마니노프 역시 뵈클 린의 <죽음의 섬>을 토대로 동명의 곡을 작곡했다.
<죽음의 섬> 연작은 뵈클린이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체류하던 중에 그린 것이다. 마리 베르나라는 백작 부인이 죽은 남편을 기리기 위한 그 림을 그에게 의뢰한 것이다. 그녀는 꿈을 꿀 수 있는 그림을 그려 달라 고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