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어떻게 통치의 기제가 되었나]
신석기시대 이래로 고대 중국에서 각종 제사회생, 건축희, 순장이 만연했음은 고고 발굴을 통해서 광범위하 게 확인되었다. 특히 인신공양의 경우는 동일 혈족이나 부족의 구성 원이라기보다는 대부분 전쟁에서 석출된 전쟁포로와 노예들을 대상 으로 자행되었다. 특히 청동기 문명에 진입한 이후 폭력성의 증폭과 비례해서 인신 희생의 규모와 빈도는 증가하였다.
손으로 활이나 화살을 흔드는 일종의 무당의 '푸닥거리(exorcism)'이자 한 바탕의 '악무樂舞'로 퇴마 행위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화살은 고대인들에게 사냥터에서는 사냥감을, 전쟁에서 는 적을, 주술적인 치유행위에서는 역귀疫鬼를 몰아내는 무위武威와 주술성을 지닌 영험한 병기兵器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고문자인 '의'자는 샤먼[巫]과 의의 조합이었기에 일찍 부터 무의巫..의 복합적 역할과 성격으로 해석되어왔다.
고대 제사관 계열의 무 巫,축祝,악樂, 사史, 복卜, 의醫 등 그 직무의 복합성도 당연히 고려할 수 있다.
마지막 형태인 '의'자에는 술통[酉]이 조합되었는데 아마도 실제 약용藥用으로 많이 활용되는 술을 혹은 약을 반영한 것이니 이는 약리학藥理學이나 임상 의학의 일정 정도 진전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의의 성격과 개연성은 충분히 설득력은 있어 보이지만 약 3,500여 년 전의 고문자를 통해 화살과 치유행위, 그리고 악무가 결 합된 역사적 실체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샤먼 들이 굿을 하며 활용하는 무구巫具에 각종 도검刀劍류와 악기류가 반드시 포함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 고대 무의巫医의 치유에 화살과 악무가 결합될 수도 있다.
이처럼 고대 무의巫醫의 치료 활 동에 수반되었던 음악이 최근에는 소위 '음악치료학(Music Therapy)' 이란 분야로 의학계에 관심을 받으며 임상되고 또 과학적으로 연구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초기 인류 문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것 같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행해지는 동 아프리카 부족사회 무의巫醫들의 음악적 치료 효과에 대한 보고를 보면, 음악의 치유 효과에 대해서 많은 것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
이상의 처방용례를 관통하는 핵심은 궁시弓矢와 태양, 그리고 음악 등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궁시弓矢의 초혼招魂의 기능, 혹은 궁시弓矢의 주술적 불제紋除 기능 등이 음악과 얼마나 직접적으 로 연관되었나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지만, 질병을 의미하는 '질疾'자 에 화살이 있는 점이나, 치유행위를 의미하는 '료'자의 안에 있는 글자의 고대 금문이 '악'자의 고문자와 거의 같다는 점, 후대에 만들어 진 형성 문자이지만 치료를 위한 의약의 '약'자가 '악'자에서 유래 한 점 등은 여러모로 '궁시와 음악'의 치유적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보아도 대과는 없다. 때문에 '악'자도 귀신을 쫓는 불제 의식을 위해 무의巫医가 흔드는 방울[鈴]에서 연원한 것이라는 고석도 그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고대 중국의 가장 중요한 의례 가운데 하나인 대사례 大射禮는 궁시弓矢와 자연의 치유, 그리고 음악과의 연관성을 시사하 는 고대의 의식이다. 초기 왕조시대부터 대사례는 왕이 주관하는 대 례大禮의 하나로서 공, 경, 대부로 책명되는 통과의례이자, 수렵과 전쟁, 그리고 제사가 함께 연계된 의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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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喜와 樂이 그 본질에서 '즐거움과 기쁨'의 요인을 공유함은 물론이지만, 희자와 악樂자가 구별되듯이 그 차이점도 제기되어야 할 것인데, 그 차이의 주요한 기준도 역시 예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고대 원시적 기쁨[喜]이 가장 본성에 가까운 '감성적'이며 때론 광적인 음악 활동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기쁨[喜]이 예적 질서에 맞게 '이성적'으로 절제되었을 때 비로소 '악樂'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니, 예禮적 통제를 벗어난 희喜는 쾌락이 되지만, 그 질서에 부합하면 예 악이라 할 수 있었다. 즉 음악은 예禮의 절제를 통해 보다 고차원적인 악무樂舞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고대인이 추구하는 그러한 '희락喜樂'의 실체를 전쟁과 수렵, 제사 와 형벌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음악은 이처럼 집단의 장에서 더욱 요구되고 그 효과도 증폭되었는데, 그것은 집단의 희락喜樂을 공유하고 극대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집단의 통합성을 제고하는데 음악이 유효했기 때문이다.
제자학의 발전과 함께 본격적인 음악론도 전개되었다. 근래 출토된 죽간이나 목간 자료를 통해 성정론性情論과 예악론禮樂論으로 대표되는 음악론의 면모가 드러났지만, 사회통합의 이념으로서의 음악론의 성립은 전국시대에 구체화되었던 것 같다. 그 점에서 순자荀子 이후 유가의 음악론은 예론을 보완하기 위한 유가의 전향적인 책답策答으로도 보인다. 직접 음악과 결부시키지는 않았지 만 초기 유가에서도 이미 군자의 소양에 '화和'가 중요함을 언급했고, 인륜론의 관점에서 '동同'의 개념을 사용했던 것처럼 순자는 그의 악론樂論에서 '중中', '화和', '동同', '삽合', '제齊' 등의 개념들을 사용하여 선진시대 유가의 음악론의 본질이 사회의 총체적 통합성임을 거듭 강조했다. 순자가 '음악을 통해 군사력이 증강되고 성벽이 더욱 공고 해진다'는 논리를 전개한 것도 다소 억측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통한 인민의 통합을 확신했기 때문이라면 전혀 무리한 논리도 아닌 것 같다. 때문에 선진先秦시대 제자諸子의 학을 망라하여 두루 정통했던 순자에게 있어 특히 묵자墨子의 비악론非樂論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논리였을 것이다.
음악은 인민들의 삶 속에서 일상화된 문화였다. 물론 그것은 희락의 속성만 지닌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여러 통과의례에서도 때로는 비애를 초극하고 정화시키는 카타르시스적 희열의 수단이기도 했는데, 즉 치유와 생장의 장에서도 음악은 중요한 기제였던 것 같다. 비록 무의巫医적 유제와 도가적 세계관의 반영이지만 음악은 죽은 자를 선계仙界 로 이끄는 절차이자 수단이었으며, 점차 음양오행 사상과 결합되면서 천지자연의 조화는 물론 자연의 축소판인 신체의 조화를 이끄는 이상체로 설정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