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예술

도서_미술2

스카이7 2024. 7. 23. 22:42


[사유하는 미술관]

 수백 명의 여성이 거주하는 하렘은 대부분 정복당한 국가의 노예 여성들이 튀르키예 말과 이슬람 교리, 음악, 문 학, 춤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교양을 익히고 훈련받는 곳이었다.  엄격한 수녀원처럼 운영되었다. 그리고 왕이 아닌 발리데 술탄(술탄의 어머니나  할머니)이 까다로운 기준으로 후궁을 간택해 왕의 애첩으로 들여보냈다.

오스만 제국에서 하렘의 첩들은 각각 1명의 아들만 낳도록 허용되 었지만 휘렘은 예외적으로 다섯 자녀를 낳았다. 휘렘왕후됨.록셀라나 노예출신  14세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인의 시각에서 동양을 바라보는 왜곡된 관점 이다. 서양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문명 사회며, 동양은 비이성적이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기이한 세계라는 서구 우월주의적 인식이 근저에 깔려 있다.  그녀가 지성과 의지, 인내와 결단력 덕분에 정치적 암투가 치열한 오스만 제국의 하렘에서 살아남고 종내 성공할 수 있었 다는 점은 간과했다.

휘렘은 당대 가장 교육을 많이 받은 지식인 여성 중 한 명으로, 외국
대사들을 응대하고 유럽의 왕, 귀족 및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했다. 폴란드 왕 지기스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와 동맹 관계를 맺어 평화로운 관계를 이끌어내는 외교적 성과도 거두었다. 
-----
 
테오도라는  스트립쇼와 마임 연기, 코미디를 하는 여배우로 일했는데 당시 여배우란 상류층을 위한 매춘부나 다름없었다. 
 황제의 조카이자 원로원 의원인 유 스티니아누스와의 만남.  귀족천민과 결혼불가 법개정 결혼함. 후에 황제되고 황후됨. 후대 악마화.
-----
 
루이 14세의 통치가 끝날 무렵에 는 프랑스 인구의 3분의 1이 섬유 또는 패션 산업에 종사.
 귀족들에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과도한 옷값을 지출하게 함으로써,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재정적인 힘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한 측면도 있다.   베르사이유궁전 행사등도.

------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 Plutarchos는 그녀의 얼굴을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않고 눈에 띄지도 않는다'라고 묘사

 2007년에 발견된 고대 로마의 주화 남자 같은 얼굴, 구부러진 매부리코, 삐뚜름한 이마. 튀어나온 뾰족한 턱, 얇은 입술, 움푹 꺼진 눈.     이런 외모의 특성은 고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족들의 초상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유전적인 것이었다. 

 이집트 역사상 최고의 격동과 혼란의 시기, 20여 년 동안 안정적으 로 국가를 통치했던 클레오파트라는 지성, 매력, 화술, 정치적 통찰력을 지닌 유능한 파라오(정치가)였다.
-------

16세기 프랑스 여왕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는 앙리 2세Henri II의 왕비이자 그의 뒤를 이은 세 왕의 어머니 그리고 섭정으로 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여성이었다. 역사에서는 잔혹한 학살자, 권력욕과 권모술수로 악명이 높은 한편 프랑스 문화와 요리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공로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녀는 이탈리아 요리, 당시 피렌체 귀족 여성의 중요한 필수품이었던 향수, 하이힐과 패션 등 고국의 세련된 문화를 프랑스에 소개했다

16세기 중반 프랑스의 식문화는 이탈리아만큼 발달하지 않았다.  식사는 채소, 고기, 향신료, 빵, 와인 또는 맥주 등의 간단한 요리로 구성되었고 주석, 나무, 금속 식기를 쓰 고 있었다.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집어먹는 핑거 푸드나 큰스 푼으로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수프와 스튜는 그릇째 들고 바로 마 셨다. 포크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으며 나이프 끝에 음식을 꿰어 먹었다.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는 받침대 위에 널빤지를 올려놓고 그 위 에 천을 덮어 식탁으로 사용했으며 식탁보에 직접 손을 닦았다.

반면 피렌체에서는 포크는 물론 무라노 유리, 파엔자Faenza" 도자기 등 고급 식기를 사용했다. 또한 피렌체 귀족들은 각각 개별 접시로 식사를 했고, 뷔페식 식사 대신 3~12개의 코스로 구성된 보다 정교한 식사 관행을 만들었다.

카트린은 피렌체의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문화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식문화에 충격을 받았다.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고 금속잔 으로 술을 마시는 것을 미개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프랑스 궁정의 귀족 들에게 이탈리아의 우아한 식사 에티켓을 소개했다. 카트린은 은색 포크와 고급스러운 도자 식기를 선보였고 테이블을 식탁보, 냅킨, 꽃과 장식품으로 세팅했다. 뷔페식 식사가 아닌 코스 요리를 차례대로 맛보 는 방식을 도입했다. 새로운 식문화는 섬세한 크리스탈 잔, 유약을 바른 도자기 접시, 자수 식탁보 등 이탈리아 트렌드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프랑스의 상류층 가정으로 빠르게 퍼졌다.
---------

중세 시대의 신앙심 깊은 여성이나 수녀에게 음식 거부는 금욕주의의 한 방식이었다. 그들은 몸을 영양 결핍 상태로 만들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려고 했다. 이를 통해 영적으로 순결해 지고 신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금식 기간 중 종 종종교적 비전이나 환상을 경험했고, 신과 소통했다고 확신했다. 성 카타리나   33세.  

종교적 자아도취 혹은 권력에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욕 망의 갈래에는 물질적인 것과 함께 명예와 명성에 관련된 것도 있다. 결과적으로 모두를 먹일 소중한 식량이 충분하지 않은 시대에 적게 먹는 것이 경건한 신앙심을 표현하는 행위라는 가치가 여성들을 희생시 켰다고 볼 수 있다.

'금식 소녀'가 등장한 시기 역시 1800년대 중반, 감자 역병으로 인 한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약 100만 명이 굶어 죽었던 때였다. 사회를 통제하고 흉흉한 민심을 수습해야 할 상황에서 '금식 소녀'를 상징적 구심점으로 하여 기아에 허덕여도 신의 은총으로 충분히 살 수 있으니 인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려고 한 것이 아닐까.

'거룩한 거식증 수녀'와 '금식 소녀' 모두, 그 배경에는 가부장제 사 회의 억압적 가치 체계라는 공통분모가 자리 잡고 있다. 극단적 금식은 신앙의 이름으로 오롯이 여성에게 지워진 짐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신체를 최대한 활용해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했다는 점에서 매우 닮았다. 견고한 가부장 사회에서 이 여성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극단적인 몸의 학대였다.  진실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

1486 <마녀의 망치>성서외 어떤 책보다도 많이 팔리며, 히스테리적 광풍을 일으켰다. 책에 따르면 여성은 어리석어 잘 속아 넘어가고, 죄와 마법에 쉽게 빠지며, 사탄에 게 영혼을 팔고, 정직한 남성을 유혹하여 타락시킬 수 있다고 한다. 마녀 사냥은 점점 일상이 되었고, 많은 여성이 고문에 못 이겨 죄를 자백 해야 했다. 피고인은 화형대에서 불에 태워지거거나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18세기까지 수백만 명의 여성이 마녀로 몰려 희생당했다.
------

모네의 '런던 시리즈'는 바로 이런 시대의 시각적 기록이다. 하지만 런던 시민들에게 템스강의 스모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고, 오히려 물질적 부와 진보를 약속하는 현대 산업 시대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 다. 예술가들도 공해에 찌든 환경을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라 보았다. 템스강은 화가들에게 색색의 멋진 안개쇼를 보여주었다. 모네는 안개가 선사하는 환상적인 빛의 효과를 사랑했고 템스강을 오염시키는 산업 사회의 폐해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희뿌연 안개 속에 가 려진 추하고 고통스러운 실상은 보지 못한 화가의 눈에, 템스강은 오로 지 황홀한 낙원일 뿐이었다. 모네는 극심한 환경 파괴를 신비하고 몽환 적인 풍경으로 바꾸어 놓았다. 예술가는 디스토피아마저 유토피아로 보이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직 나를위한 미술관]
헤라클레스Heracles  헤라의 영광.   은하수  헤라의 젖

로마인들이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아주 강성했던 그리스 식민도시인 '그라이코스'를 보고 그 지역(이탈리아 남부 그리스 식민도시들)을 대(大) 그라이키아(Magna Graecia, 마그나 그라이키아)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전체 그리스를 지칭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희랍(希臘)', 그리스'가 아닌 '헬라스'에서 비롯된 것.
 그리스 신화에서 대홍수(인류 공통 신화 모티브 중 하나) 이후 살아남은 그리스인의 시조 헬렌

영원히 잠들게 될 오필리아를 떠올리며 양귀비꽃을 그려넣었을 것임.

예술가들은 때때로 거짓말처럼 작품이 운명처럼 다가오기도함. 마치 <예브게니 오네긴>의 결투 장면처럼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이 실제 결투 중에 사망하고,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가 기차역에서 사망한 것처럼 톨스토이(1828-1910)가 기차역에서 객사하였음.

작품에서 모델로 열연했던 엘리자베스 시달은 이후 아편 과다 사용으로 사망에 이름.♥

 

[모던빠리]

 고흐의 스타일, 색채 연구 및 붓놀림을 좋아하던 이들은 '본능'과 '색채의 자율성'에 기반한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으며, '무엇을 그렸는지 생각하지 않고 감정을 붓으로 옮기 기 위해' 자신이 느끼는 색으로 사물을 칠했다.

야수주의 작가들 자신은 부정했지만, 이들은 모두 고흐의 격렬한 붓질, 고갱의 강렬한 색채, 쇠라의 분할된 붓질과 캔버스의 여백등 이전 세대의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 다. 표현한 대상이 자연 풍경이든 도시 풍경이든, 초상이든 간에 무엇보다도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야수주의 그림들 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야 한다는 유사성의 원칙과 거 리를 둔다. 그렇게 야수주의는 20세기 내내 지속될 색채 실험 을 시작하며 20세기 초의 모더니즘과 예술적 격변을 알렸다.

마티스의 말을 빌리자면, 야수주의는 감정적인 '충격'을 주면서 색채에 감정과 감각을 부여했다. 그들은 인상주의처럼 색을 통해 빛의 불안정성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색채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쌓음으로써 작품에 대한 자신의 견해 를 공고히 했다. 그런 맥락에서, 야수주의는 고흐로 대표되는 후기인상주의와 쇠라의 신인상주의를 결합해 극단적으로 확장시켰다고 볼 수 있다. <제3회 살롱 도톤)을 통해 공식화된 선언함 

야수주의 운동은 1905부터 1910년까지 5년 동안만 짧게 지속되었음에도,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회화 운동 중 하나가 되었다. 이제 예술가들은 회화에서 색채가 하는 역할과 현실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야수주의 접근 방식을 채택한 예술가들에게 이 예술운 동은 향후에 이어질 발전을 위한 과도기적 디딤돌에 가까웠다. 1906년 《제4회 살롱 도톤》에 다시 모인 이들의 작품을 본 바실리 칸딘스키는 큰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브라크는 훗날 지나치게 큰 관심을 받은 직후에 어떤 공황 상태를 느꼈으며, 이런 상황에서 영원히 같은 예술적 실험을 하며 살 수는 없었 다고 털어놓았다.

1908년 《제6회 살롱 도톤>에 이르러 야수주의에 속했던 주요 예술가 대부분은 표현적 감성주의에서 벗어났다. 한때 야수주의 화가였던 브라크는 피카소와 함께 입체주의를 발 전시켰고, 야수주의 창시자 중 한 명인 드랭은 좀 더 전통적인 신고전주의 스타일을 채택했다.  블라맹크의 말처럼, "야수주의는 발명이나 태도가 아니라 존재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숨 쉬는 방식"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활동한 예술가 세대는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아 혁신적인 예술을 추구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섹숑도르 전시>에서 이루어진 예술 실험이 없었다면, 색으로 넓은 면적을 채우는 컬러 필드Color field나 각 구역의 색상 간의 경계가 분명한 하드에지 Hard-edge 페인팅은 물론 형 태를 극도로 단순화하는 미니멀리즘 Minimalism 같은 시도도 없었을 것이다. 입체주의 실험에는 추상표현주의'를 비롯한 수많은 현대미술의 미학이 숨어 있다. "대상을 바라보는 눈 만큼이나 많은 대상의 이미지와 그것을 이해하는 마음만큼 이나 많은 대상의 본질을 작품에 담아내고자 한 그들의 생

섹숑도르 황금분할  입체파의 수학 도입시도

입체주의 혁신을 중시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입체주의 작가들은 예술의 유일한 법칙은 시간의 법칙이라 고 말했다. 예술가는 과거의 예술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 예술가는 자신의 시대에 속해야 하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스스로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입체주의는 대중이 보는 것과 대중이 이해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민했고, 이후 모든 세대의 추상 예술가들이 동일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초기 입체주의의 지적 충만함을 제대로 살펴본다면, 입체주의가 지난 세기 가장 급진적인 회화 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풍부한 미래적 가능성을 지닌 운동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활동한 예술가 세대는 입체주의에 영향을 받아 혁신적인 예술을 추구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섹송도르 전시>에서 이루어진 예술 실험이 없었다면,  하드에지Hard-edge 페인팅은 물론 형 태를 극도로 단순화하는 미니멀리즘 Minimalism 같은 시도도 없었을 것이다. 입체주의 실험에는 추상표현주의'를 비롯한 수많은 현대미술의 미학이 숨어 있다. "대상을 바라보는 눈 만큼이나 많은 대상의 이미지와 그것을 이해하는 마음만큼 이나 많은 대상의 본질'을 작품에 담아내고자 한 그들의 생각임.

다다는 정의 없음
다다이스트들은 이성과 논리, 규칙과 규정에 의존하는 사회에 실망했다. 이들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무법 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했다. 그들은 반체제, 반사회, 반종교, 반예술을 표방하며 마치 어린아이의 눈으로 본 것처럼 세계 의 질서를 다시 세우려 했다. 

1921.6.《살롱 다다>는 회화, 조각, 사진, 행위 예술 등 다양한 예술 형식을 선보인 이 전시 덕분에 다다 운동은 파리에서 발전 하고 퍼져나갔다. 《살롱 다다>를 통해 다다이스트들은 미술계의 주요 세력이 되어 유명세를 얻었다. 전시에 참여한 많은 예술가들은 전통적인 미적 가치를 거부하고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살롱다다》는 초현실주의와 같 은 다른 아방가르드 운동의 발전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다다이스트들의 작품과 아이디어는 예술과 문화에 대한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접근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계속해서 연구되고 있다. 최초의 학제간 예술운동이라 할 만한 다다는 무정부주의와 장난을 통해 예술계를 영원히 바꿔놓았으며,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 을 했다. 여러 인쇄물을 조합하는 콜라주, 사진을 조합하는 포토몽타주, 기성 제품을 수집하는 아상블라주, 이미 만들어진 기성 용품을 새로운 측면에서 바라보는 레디메이드와 같은 새로운 예술기법을 발명했다. 이후 다다는 대중문화 이미 지를 이용하는 팝아트에 영향을 미쳤고, 저항을 외친 1970년대 펑크 문화에 영감을 주었고, 아이디어를 중요시하는 개념미술의 기초를 제공했다. 폴 매카시의 작품부터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 아트, 데이비드 보위나 레이디 가가의 공연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예술과 대중문화의 모든 곳에서 다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다다 정신은 전후라는 역사적 맥락, 허무주의의 대두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다다는 질문과 허풍, 도발을 던지며 회화, 시, 사진, 영화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했다. 예술안에 예술이 아닌 것을 새겨 넣으며 미적 범주와 아름다움의 의미를 재검토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기원과 근본을 부정했던 다다는 역설적으로 현대미술의 기원이 되었다.

프랑스어 '아르 데코라티프art décoratif', 장식미술은 넓은 의미에서 '디자인 미술'을 뜻한다.  줄임말인 '아르데코 art déco'는 보다 좁은 의미로. 1925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장식 및 산업 미술 박람회 Exposition Internationale des Arts Décoratifs et Industriels Modernes≫를 통해 탄생한 미술 양식

아르데코의 주요 원천 중 하나는 지난 세기 말에 몇 년 동안 유행하던 아르누보였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해 20세기 초까지 유행한 아르누보는 그 전까지의 역사주의 양식을 거부하고 좀 더 '현대적'인 스타일을 도입해 전통과 결별하려고 한 '아방가르드 디자인' 이었다. 1900년이 되자 디자이너들은 아르누보의 한계를 느 꼈고, 1925년에는 더 '현대적'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과 마주 했다. 전쟁 중에 파괴된 시설과 주택을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아르데코는 산업과 현대 생활에 더 적합한 단순하고 깔끔한 기하학적 형태를 추구했다. 아르데코는 성장하는 산업과 기술, 입체주의 건축의 바우하우스와 같은 동시대 예술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르누보 건축가들은  독자적으로 활동한 반면 아르데코를 추구하는 장식미술가들은 서로 협업해 훌륭한 결과물들을 보여주었다.

 다양한 스타일, 출처, 영향의 집합이다.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 그 이상이다
 일상적인 사물에 현대성을 적용하려는 욕구, 전통과 현대의 조화, 심미와 기능의 다양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아르데코는 지극히 매력적이었다. 디자인은 시대의 욕망을 반영하는 수단이자 사회를 이해하는 도구이고, 좋은 디자인이란 우리 삶에 적합한 존재와 형상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1938년《국제 초현실주의 전시는 흰 벽으로 둘러싸인 갤러리와 미장센을 거부하고 예술 작품과 관람자에 의해 '발견되는 것'을 동등하게 강조했다는 점에서 1960년대 전시와 설치 미술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전시는 관람자 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며 아방가르드 미술의 파격과 실험성을 제대로 드러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를 "생각의 실제 기능을 표현하고자 하는 순수한 정신적 자동주의"이자 미적 또는 도덕적 선 입견 없이, 이성에 의해 행사되는 어떠한 통제도 없는 “사고의 받아쓰기"라 정의했다. 
 이들의 초현실주의적 실천 덕에 전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었다. 오늘날의 미술, 나아가 오늘날의 세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품었던, 1938년이었다.


[명작의 탄생]

강화도 강화성당 1900 성공회. 고종 영국과 해군사관학교설치(1년간)
성공회신자 활성화
정제두 강화학파 성리학 벗어나 사회모순극복 양명학토대. 신자발판
100년된 백두산소나무 압록강통해 들여옴. 외부 한옥구조 내부 바실리카양식. 향교와 흡사. 

보리수 안도에서 수입. 동종건립.

새문안로 망치질하는사람2002 브로프스키 세계11개 
망치질 1분→35초.  2008 5m이동. 유지비 1년 7천만원.
노동의 숭고함과 현대인의 고독표현.

1000원지폐  溪上靜居圖 도산서당의 이황모습 정선그림

겸재 정선은 한양의 북악산(당시 이름은 백악산) 자락, 그러니 까 지금의 서울 종로구 청운동 경복고등학교 자리에서 태어났다. 경복고 교정에는 이를 기억하기 위한 집터 표석이 세워져 있다. 정선은 52세에 인왕곡(지금의 서울 종로구 옥인동)으로 이사했고 이곳에 서 살다 84세에 세상을 떠났다. 정선은 지방의 현감을 하느라 몇 차례 서울을 떠나 살았던 적이 있지만 84년 인생의 대부분을 서울의 북악산, 인왕산과 함께했다. 인왕산과 북악산은 조선의 국토였고, 화가 정선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인왕霽色圖(비갠 제) 절친 이병연(시인,후원자) 쾌유빌며.
금강전도와 함께 손재형 소유였다가 삼성간후  인왕만 기증

세한도 손재형→손세기(손창근)

신라 수막새 수기와 마감재.  1995  LG마크가 됨

 
[요즘미술은 진짜 모르겠더라]  현대미술
■미니멀리즘은 작가의 개입을 배제하고, 공장에서 제작된 기성 재료 를 사용하며, 작품이 반복적으로 배치되는 모습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관람자의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작품과 관람자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두고 있죠. 모더니즘 미술 이 매체의 특성을 존중하면서 장르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했 다면, 미니멀 아트 또한 환영을 제거하기 위한 목표에 집중하 면서 평면성과 사물성을 극단으로 강조한 경향이 있습니다. 물 론 미니멀 아트는 장르의 순수성을 극한으로 탐구하다가 예기치 않게 그것을 깨뜨리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지만요. 미니멀 아트는 모더니즘 미술의 정점인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의 이행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념미술
 토니 고드프리 Tony Godfrey의 네 가지 분류. 
첫째는 마르셀 뒤샹의 <샘>에서처럼 일상의 사물을 예술로 만 드는 '레디-메이드' 경향이에요. 
둘째 '개입 Intervention'은 오브제 를 새로운 맥락으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미술관 바닥에 안경이 떨어져 있다면 '이것도 작품인가?' 하고 흠칫 하게 되는 것처럼 요. 
셋째는 '자료형식 Documentation'으로, '보는' 미술이 아닌 '읽는 미술이 여기에 속합니다. 기록, 지도, 차트, 사진 등을 제시 하는 작품들이 그 예죠. 
그리고 마지막 분류는 '언어Language' 인데요, 예전에도 언어가 등장하는 작품이 종종 있었지만 개념미술에서 언어 작업은 그 자체로 작품이 됩니다.
■퍼포먼스 - 행위예술
퍼포먼스를 평가하는 기준
에리카 피셔-리히테Erika Fischer-Lichte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게 하는 변환적 힘의 정도와 기능" 이것은 관객으 로 하여금 어느 정도의 '변환'을 불러일으켰는지가 미학의 기 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보통의 예술 작품이 작가의 고뇌와 고독에서 탄생한다면, 퍼 포먼스 아트는 관람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완성됩니다. 미술관에서 관조적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하 나의 사건처럼 다가오는 것이죠. 퍼포먼스 아트를 감상하는 관람자는 일반적인 예술 작품을 볼 때보다 훨씬 큰 충격을 받습 니다. 퍼포먼스를 보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달라지는데요, 이것 이 바로 '변환'의 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팝아트
앤디 워홀[silver car crash]이 활동할 당시 자동차는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가치인 '부'를 표상하면서도 자동차 사고를 소재로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모두가 욕망하는 상품의 이면을 함께 보여주고자 했어요. 소비나 부가 우리의 욕망이라 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그 욕망이 초래할 위험 또한 간파한 것이죠. 앤디 워홀의 작품은 우리의 욕망을 만들어내는 소비 사회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소비사회를 이해할 수 있죠. 그가 표현한 상품들 은 우리의 욕망 그 자체이며, 소비사회와 자본주의의 궁극적 가치인 '부'를 표상합니다. 하나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복제 하는 형식은 산업사회의 대량생산 시스템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대 물질문명에 대해 이야기하면 서 소비사회와 비인간화, 그리고 그에 따른 현상들을 표현함으 로써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가치를 다시 인식하게 만듭니다.
■ 장소 특정적 미술  - 주변 환경의 맥락에 의해 규정되는 작품.  미술을 위한 공간은 화이트 큐브에서처럼 더 이상 텅 빈 벽이 아니고, 관람객이 '지금, 여기'의 시공간을 다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었습니다. 특정 장소에서 느끼는 감각이 작품 감상의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게 된 것이죠.  작품과 장소가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데에 초점을 맞춤.
여기서 장소는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공간을 통과해 사회적 담론으로 이르는 경로일 것입니다. 이제 장소 특정적 작품들은 실제 장소에 물리적으로 귀속되지 않고 개념적 담론적으로 확장되는 모습을 띱니다. 
■포스트휴먼은 트랜스휴먼과는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트랜스휴먼은 인간 신체 능력의 향상을 의미하는 것 으로, 신체의 한계와 조건을 넘어서기 위한 목적을 지닙니다. 기술을 통해 인간 초월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인간이 스스로 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기계를 받아들이는 것인데요, 이 또한 인간중심주의적인 사유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 포스트휴먼은 인간과 비인간을 해체하려는 시도에서 나 온 개념입니다. 트랜스휴먼이 인간 종種을 강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 반면, 포스트휴먼은 기술을 통해 인간의 존재를 확장하는 것을 넘어 인간 종의 변형을 말합니다. 기술로 인해 인간 종 자체가 변화되는 양상을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많은 현대 미술가들이 포스트휴먼을 주제로 작업을 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인간 존재에 재접근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미래로 갈수록 인간과 비인간이 혼합된 모습들은 늘어날 것으 로 예상해요. 이러한 상황에서는 양 존재 사이의 대칭과 연결 이 점차 중요해지겠죠. 브뤼노 라투르의 '연결망' 개념에서처 럼 사회 속 여러 집단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사 실을 인정하고, 인간이 자연을 만들어낸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도 필요할 테고요.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이 세계가 네트워크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배우게 됩니다.
■관계미술:  관람객은 작품을 생성하고 변화시키는 공동 작업자 로서의 지위를 얻게 된다는 게  관계미학의 핵심입니다.
1990년대의 시대적 배 경을 보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1991년 소비에트 연방 해 체 등 냉전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신자유주의가 확산했습니 다.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의 확산은 사람 들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킨 측면이 있어요. 시장성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면서 인간관계가 와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관계미술 작품들은 '사회적 틈'을 나타냅니다. 이 틈을 이윤의 법칙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경제로 부터 탈피하는 교역 공동체. 이 틈이 발생했 을 때 인간은 자유로운 상호작용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죠. 
 관계미술은 예술가의 개인적 자아를 표현하는 기존 예술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 다. 인간의 상호작용과 사회적 맥락을 중요시하는 동시에 인간관계에서 참조할 수 있는 것들을 예술적 형태로 구현한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의 새로운 표현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공미술
 작가의 의도가 중심이 되었던 공공미 술 경향은 수용자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로 점차 진화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공공미술은 장소적인 개념보 다는 관객, 관계, 소통,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개념들과 훨씬 더 맞닿아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기후 위기, 페미니즘, 홈 리스, 가정폭력, 에이즈와 같은 사회적 문제에 목소리를 내기 도 하고, 권력과 자본주의, 지배구조에 저항하는 시위를 벌이 기도 합니다.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다양한 가능성이 공존 하는 미래를 만들 수 있도록 상상력이 충만한 공간을 창조해 내는 것이죠.
■가상  ■인공지능
-------
 현대미술은 '세계에 대한 이해'가 아닐까 합니다. 미술 자체를 많이 아는 것보 다 오히려 동시대 세계 정세나 자본주의, 철학, 역사, 과학 등 을 이해하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훨씬 더 큰 도움이 되니까요. 현대미술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세계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문제에 집중하게 된다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음악, 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서_음악4  (4) 2024.09.10
도서_예술 건축  (1) 2024.08.25
Immortal Classic list  (1) 2024.06.10
도서_음악3  (0) 2024.05.08
연주_러시아2  (0) 2024.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