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이승만의 반역행위

스카이7 2023. 9. 5. 23:16

1945년 4월 2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을 창립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 공산주의자들이 임시정부 대표단에 참여할 것을 제안(대표성때문). 
이 조건을 반대한 것이 이승만. 이승만은 미 국무부의 비난과 한인 반대자들의 심한 질타를 받으며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워싱턴으로 귀환.

임시정부가 국제연합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박탈. 미주 지역 한인 전체의 지지를 받는 임시정부 대표단이 유엔 창립총회에 참가할 기회박탈

일제강점기하에서는 독립운동을 훼방하고, 
해방 뒤에는 분단을 조장하고 민족통일을 방해했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고 친일청산을 방해했다. 
또 민주공화국 이념을 파괴하고 장기 독재와 선거부정을 저질렀다. 
그런 뒤 국민들이 궐기하자 하와이로 달아났다.
이승만을 쫓아낼 때 임시정부는 "하루라도 국가원수의 직에" 둘 수 없는 자라고 규정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988739

3·1운동 나흘 전인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은 한국이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도록 해달라 청원. 
일본이 핵심 구성원인 국제연맹의 통치를 받게 해달라고 간청
4일 뒤 우리 국민들은 '위임통치 만세'가 아닌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4·19가 옳았다면, 이승만은 나쁜 인물이 된다  논리가 없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001948

 

청년기 때는 개화파, 인권운동을 하면서 존경을 받았는데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경성감옥에서 풀려난 뒤 미국으로 건너가면서부터  청년 이승만  모습을 잃음.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장인환 두 의사가 고종 황제의 외교 고문이자 우리 국록을 받으면서 일본을 홍보해 온 스티븐슨을 살해. 이승만은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 코스를 받고 있을 때. 샌프란시스코 사탕수수수 밭에서 일하던 동포들이 돈을 걷어 왕복 비행기표를 사줬는데 -  기독교 신자이기 에 살인마를 변호할 수 없다 . 변호가 아니라 통역을 해달라는 건데, 이조차 거부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인 1919년 1월, 독립운동가들이 절대 독립을 주장했던 시절 미국에 일본 대신 위임통치를 해달라고 주장했던 인물. 그 때 신채호 선생은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는데,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었다 면서 의정원 회의장을 뛰쳐나가기도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임이 됐는데도, 1년 반이 지나도록 상하이에 오지 않음. 독립군들은 1920년에 있었던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을 치르면서 무장투쟁을 하던 때 이승만은 외교를 통한 독립을 주장. 당시 일본은 미국, 영국과 한패였습니다. 말이 안 되는 허망한 주장 

결국은 임시의정원이 6가지 이유를 들어 이승만을 탄핵, 불명예스럽게 미국으로 쫓겨난 뒤 임시정부를 매도함. 당시 미국에 있던 외교 총책임자인 이승만의 이런 언행 때문에 그 이후 미국 정부가 우리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음,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조선인들은 분란이 심해서 , 이런 요인을 제공한 건 이승만

환국할 때 미군 대령 군복을 입고 들어온 이승만이 미국 협력을 받아서 대통령이 됐는데, 무엇보다도 용서할 수 없는 건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체시켜버린 것. 지금도 친일 후손들, 언론, 법조인, 재벌들이 대물림되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 암살의 중심은 이승만의 핵심측근인  88구락부 였기에 이승만의 입김이 작용했지 않았을 수가 없었다. 6.25 전쟁이 터진 뒤 3일 만에 서울을 떠나 피난하던 이승만은 육군 형무소에 있었던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를 풀어줬다, 왜 하필이면 수많은 정치범과 사상범 중에 안두희였을까

사사오입 개헌, 죽산 조봉암 선생 사법살인, 민간인 학살 등. 검찰은 3.15 부정선거 때 마산에서 시위한 학생들의 호주머니에  인민군 만세   김일성 만세  등의 쪽지를 집어넣고, 결국 김주열 열사를 죽여서 바다에 던져버림. 4.19도화선 됨.

이승만- 일민 민주주의, 박정희- 민족적 민주주의 , 북한 김일성- 인민 민주주의 , 푸틴-주권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선거제, 복수정당제, 권력 분립주의 등이 통합된 개념

 

정병준 교수의 <우남 이승만 연구>

OSS 문건을 포함한 당시의 미국 측 자료

"학병으로 중국 전선에 끌려 나갔다가 1945년 초 일본군을 탈출한 한국 학생들이 OSS 중국 지부에 밝힌 한국 저명인사의 명단을 보면, 송진우·여운형·김성수·유억겸·장덕수·조만식·신석우·이태준·이광수·한용운·한상룡·양주동·최린·유진오·이기영·방응모·이관술·이관구·정인과 등 주로 민족주의 계열의 인물들이 거론되었다." 
지하운동을 하고 있는 지도자 : 여운형·윤치호·이광수·김일성 등을 거론했을 뿐 이승만의 이름은 거명하지 않았다"라며 "미군 CIC 6개 지대가 공동으로 조사해 작성한 <지역연구: 한국>(1945년 8월)은 한국의 3대 인물로 조만식·윤치호·김성수를 꼽았다"라고 설명한다.

"홍익범이 입수한 이승만 중심의 정보는 국내 민족주의자들에게 과장된 형태로 전달되었고, 증폭되어 유포되었다"라며 그 정보 속에 "이승만 일파는 미국 정부의 원조를 받아 동지(同地)에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해 미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한 뒤에 조선독립운동을 하고 있음"이라는 내용도 있다고 소개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군사적 방법으로 독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허위 정보는 미국이 일본을 꺾은 뒤에 이승만의 위상을 높이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1945년 10월 16일에는 70세 된 이승만에게 미군 군복을 입히고 더글러스 맥아더의 전용기에 태워 김포공항에 내려놓았다. 꼭두각시를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이승만을 33년 만에 귀국시켰던 것이다.

이승만은 자기 기반으로 이룩한 일도 없고, 한국인 조직(친일파 제외)과 제휴해서 성취한 일도 없다. 잊힌 자신의 존재를 미국 덕분에 어느 정도 알려 나가다가 미국의 배려로 귀국하고 미국의 도움으로 정권을 차지했다. 국부로 인정받는 데 필요한 요건이 전혀 구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만기념관이나 이승만 동상과 관련된 사업들은 하나 같이 허상의 이미지에 기초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은 허상의 이미지로 12년간을 버티다가 1960년에 하와이로 달아났다. 문제의 메커니즘에 주목하지 않는 지금의 보수세력이 이승만 미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986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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