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처칠이 잘못한 점

스카이7 2023. 1. 26. 01:27

처칠이 잘한 일은 너무 많이 알려져 있으니 잘못한 점을 정리해 본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해군 장관
영국에서 건조중인 오스만제국의 해군 전투함 2척을 강탈하여 영국 해군에 편입  오스만제국이 독일편에서는데 일조
다다넬스해협 갈리폴리 상륙 작전(1915년 2월~1916년 1월) 실패후 장관에서 해임됨(케말 승리)- 오스만을 우습게 보았음

육군의 반대에도 무리한 작전수행후 패전. 영국의 초급장교(주로귀족) 1/3 사망 - 일본 군사 전문가도 개탄. 중요자산인 장교손실 복구어려움 -  연합군 57만중 25만명 사상자, 오스만군 32만명중 25만명 사상자

전력약화되어  1차대전이 길어지는데 기여 
이후 2차대전때 영국은 터키가 중립을 지키도록 애걸

2차대전전 당시의 안일한 흐름은 1938년 9월의 뮌헨 협정 체결 때 절정에 이른다. 독일과의 전쟁을 꺼려하던 영국으로서는 뮌헨 협정으로 '우리 시대의 평화'를 얻은 체임벌린 총리를 비판한 처칠을 좋게 볼 수 없었다. 이때 처칠은 "치욕과 전쟁,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자리에서 둘 다 선택했다"라고 연설했다.

(독일의 암호를 해독못해 히틀러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었다. 뮌헨 협정후 히틀러는 군부에서 확고한 입지구축)


처칠이 총리였어도 체임벌린과 비슷한 행보를 보였을것이다. 윈스터 처칠은 체임벌린의 태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지만,체코슬로바키아 당국에는 자신이 영국 수상이었더라도 같은 정책을 펼쳤을 것이라고 은밀하게 말했다.[제2차 세계대전,게르하르트 L. 와인버그,P.29]

1938년 9월 뮌헨 협정- 체코의 핵심 군사 방어 거점과 Sudeten지방을 나치 독일로 양도
독일을 견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피해만 두려워하던 영국, 프랑스, 폴란드, 소련은 제대로 대응을 못함(프랑스는 1차 때 입은 피해가 너무 커 제대로 수복하지 못함. 영국은 섬나라라 직접적인 견제력이 약했으며 폴란드는 제대로 독립한지 얼마되지 않았고 소련은 대숙청이 발목을 잡았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 제2차 세계대전 시작.
1940년 4월~6월 독일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 영국해군 패배(항공모함 침몰). 체임벌린 사퇴 처칠등장

별명- 영국에 내려보낸 또 하나의 히틀러.
카이로 회담(1943년11월)에서 조선의 독립 반대. 장개석은 지지
인종차별주의자, 식민지를 수탈한 영국 정치인.

1943년에 수백만 명의 인도인을 굶겨 죽인 벵골 대기근 -  영국 정부군대에 우선식량 배분,  물가 상승, 대기근 후에 대처 허술함. "인도인들은 토끼처럼 번식한다"라는 발언을 함

전략적 안목은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 처칠과 비교하면 히틀러는 아마 나폴레옹이라 불려도 좋을 것이다. 싸우는 깡은 있는데 싸우는 법은 몰랐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방어 상황에서 무리하게 공세에 나섰다가 큰 피해를 입고 공격을 거부하면 장군해임.
몽고메리는 처칠의 되도 않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준비가 될 때까지 버틴 후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을 격퇴.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전선 종료 직후 극렬한 반공주의자인  처칠은 모스크바 침공계획(언씽커블 작전: 45년5월보고서-위험한 계획으로 결론). 몽고메리등 결사반대. 미국동의 불가.1998년에 세상에 공개
소련이 점령한 곳인 드레스덴 지역에 영미 연합군이 최대 47개 사단으로(미국 영국 폴란드군 독일군 380만명) 소련군(+친소연합군 670만명)을 선제 공격
연합군이 새로운 전쟁을 시작한다면 소련이 일본과 동맹을 맺을 것이라 추측. 그렇게 되면 일본이 더 버티게 되고 빠른 종전불가 

1952년 수상재직시 런던 스모그 대처를 하지 못해 약 1만2천명이 목숨을 잃고, 10만명이 질환을 얻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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