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달타 - 바른 연기관 사성제 - 고집멸도, 사성제의 결론은 팔정도(윤리적 강령)
계,정,혜 계 정 혜
계- 정어, 정업, 정명 바르게 말하고, 행하고, 생활하고,
다음 정 - 정념, 정정
혜 - 정견,정사유
정정진은 계,정,혜 삼자에 공통된 미덕 : 팔정도가 곧 삼학
정 - 정신통일(삼마디 = 삼매) (계 - Health 정 - Attention 혜 - Knowledge)
지눌 - 돈오점수 (돈오:단번에 깨닫는다)
정혜쌍수 = 정과 혜를 동시에 닦아야 한다
깨달음이 선행치 않는 닦음은 번뇌의 연속
돈오가 오면서, 깨달음이 오고 난 다음에 깨달은 본성을 가지고 그걸 지키기 위해 또 닦아야 한다.
성철
깨달음을 가지고 또 닦아야 한다면, 이건 진짜 깨달음이 될 수 없다
진정한 깨달음은 다시 닦음이 필요치 않다는 의미에서 돈수
돈수까지 되려는 깨달음이라야 깨달았다고 말하라
해오 - 일반적 이해, 증오 - 증득하여 철저하게 깨닫는 것
해오는 선법의 반대, 해오는 대도에 상반된다
초기불교의 핵심적 가르침은 오에 있다기 보다, 수에 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가지 닦을 수밖에 없는 존재
작은 깨달음에서 큰 깨달음까지 온다
닦아야 끊임없이 수양. 하면서 벗어나는 것
불교의 핵심은 무아, 이론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무아의 소이는 무아행
지눌의 돈오점수의 점수는 자비를 위한 것
자비행으로 실천해야 하기 때문에, 돈오점수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베풀 줄 알고, 하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주어가 없이도 성립하는 문장. 충분히 성립. 주어중심의 문법에서 요즘에는 동사중심으로, 문법학에서도. 주어중심설 - 동사중심설
니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 How are you? 근데 우리는 "안녕하십니까?" 어디갔어요? 주어가 없어요. 사실 주어가 없는 게 우리 말에 더 아름다운 언어에요. 불교적 사유를 하는 거에요. 주어가 숨은 주어로 감추어져있다 할지라도, 명제에 있어서 주어가 꼭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술부를 주어의 종속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실체적 사유의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
같은 체계. 동일성의 유지하는 것 아트만(자기동일성체계 = 아트만) 그런데 이 아트만이 있을 수 없단 것. 왜? 연기. 서로 연기되어 있잖아요.
"내가 산다"라는 명제도 성립할 수 없다. 나와 삶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간다. - 나의 인생 밖에 나라는 존재자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명제도 성립할 수 없다. 내가, 인생 밖에 내가 따로 있고, 어떻게 내가 나의 인생을 살아가? 분리될 수 없는데. 근데 마치 불변의 나가 있는 것처럼. 관조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이 언어의 오류, 사고의 오류. 이것을 연기의 눈으로 지적한거여.
싯 타는 우리의 사고의 오류를 연기론으로 지적한 것
너와 나, 주관과 객관의 언어적 분별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한 몸이 될 때 비로소 대자대비의 마음이 생겨난다. 그러니까 불교의 이론이라는 것은 아가페, 사랑을 베풀어라. 연기를 깨닳아라. 근원적으로 나가 없다라는 것을 깨달아라. 연기의 핵심이에요. 얼마나 귀중한 가르침이에요? 불교의 윤리는 신앙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모든 형이상학적 실체학이 무너지는 거에요. 무아론은 모든 실제를 무너뜨린다 그러므로 모든 형이상학이 존립할 수 있는 근거가 무너진다. 불교는 철저히 반형이상학적이다.
불교는 현상론이다. 불교의 본체론:연기론,실상론,현상론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실상과 본체가 연기일 뿐이요, 현상일 뿐이다.
형이상학적인 탐구라는 건, 언어로써 구상. 실체화해서 형이상학 만든 것. 모든 이런 형이상학 언어에 속아서, 그래서 원시불교에서 선의 핵심이 들어있는 것. 통하게 되어 있음. 싯달타는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부정해야 한다. 빠져들면 안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부정해야 한다. 이러한 원시불교의 사상에 이미 선불교적 요소가 다 들어있다.
언어로 싸여있는 나를 해체시켜야 한다. 무아는 언어로 구성된 나의 해체이다. 우리는 언어에 의해서 끊임없이 기만당하는 존재라는 것은 싯달타는 2천 5백년 전에, 이미 설파하신 대철학가. 사상가였다.
싯달타의 태어난 곳. 룸비니.
내가 깨닳은 곳. 보드가니죠.
내가 최초로 설법한 곳. 사르나트.
사슴이 많은 곳. 입멸지, 쿠시나갸르.
이 네 곳을 기념하게 될 것이다. (사성지)
부처님의 무덤:스투파 -솔탑파 -탑파-탑
탑의 의미의 변천이 곧 소승과 대승의 열쇠
유식 - 마음이 생하면 갖가지 법이 생긴다. 마음이 멸하면 집의 감로수나 무덤의 썩은 물이 둘이 아니다.(원효)
유식론의 알라야식론은 바로 무아론과 윤회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다
그건 의식 밑에 있는 집요한 의식: 마나식
윤회의 주체는 알라야식이다. 이 알라야식은 먼 태고적부터, 무시이래의 훈습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바로 아라야식의 윤회. 의식적 나는 이 다음에 환생에서 전혀 찾을 수 없는 거에요. 유식사상은 이 알라야식조차 무명식이라고 생각하며 망식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부정의 대상이다. 전식성지 : 알라야식을 전환시켜 반야의 지혜를 이룩한다. 이것이 유식의 실천적 궁극목표다. 이 식을 변화시켜서 지혜를 이루느냐? 그러니까 이 장식을 끝끝내 윤회하는 동안, 표층의식 밑바닥, 여기까지 모두 없앨 적에 윤회의 고리로부터 해탈된다.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난고 있는 모든 객관세계는 결국 나의 식의 장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결국 나의 의식의 투영이라는 것을 깨닳는 새로운 방법의 의식이다. 유식은 우리의 마음의 혁명이며,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의 혁명이다.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근본적으로 나의 의식의 투영이라고 하는, 의식내 사건이라고 볼 때만이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게 전식성지. 견분 : 의식 내의 주체 상분 : 의식 내의 객체 식을 전환시켜서, 변화시켜야 하는데, 육식까지 아니라 아라야식까지 전부 변화시켜야 한다. 철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소승 - 대승 - 반야 - 유식 - 선
유식을 만든 사람: 요가행파. 유식사상은 요가행을 닦는 사람들의 선정체험에서 나온 실천적 이론
인도의 스투파개념에 가장 가깝게 오는 게 분황사석탑
아쇼카왕이 항아리를 끄집어 내다가 8만 4천개의 스투파를 만듬
스투파 돌무덤은 출가승단이 아니라, 일반 재가신도들의 공력으로 이루어진 것
스투파는 부처님의 형상이 아니다.
신(알라)은 어떠한 형상으로도 그려질 수 없다 - 장식을 글씨로iconography
이슬람 -우상거부주의
초기불교- 비형상주의
박트리아 (대하) 로마, 중국 , 인도 문명의 접점->큐산 왕조, 간다라지역
성문(sravaka), 독각(pratyeka-buddha)
아라한(Arhan) - 더 이상 배움이 필요없는 무학위의 존경스러운 사람. 성문, 독각의 이상. 그러나 아라한위는 불위가 아니다.) 부처가 될 수 있는 건 아님
탑공양하러 온 사람들에게 이야기들음 - 공양을 하고 그걸로 먹고 살게 됨. 이 사람들이 승단을 조직. 대승의 출발.
무형상주의. 독신, 수행중심주의 아라한 주의, 다르마. 법 중심, 부처중심이 아님, 진리중심 (소승)
(대승) 스투파쪽, 계율 지킬 수 없으니, 자비 구함, 신앙중심
보티사타라는 것을 만듬. 보살 - 과거 소승의 보살은 선택된 엘리트였으나, 대승보살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생명이다. 보티 - 깨닳음, 삿트바 - 의식이 있고, 감정이 있는 모든 존재
깨닳음을 추구하는 자들이여 나를 따르라. 너희들은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보살의 개념에는 출가승과 재가신도의 구분이 없고,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의 구분이 없고, 성과 속의 구분이 없다.
간다라 중심 불상운동 - 우상주의로 타락
불상에 대한 강력한 집착 깨게 되는 운동이 반야사상. (반야사상 - 부처형상의 거부.) 형상을 형상다웁 게 만드는 지혜. 그것은 일체평등의 지혜며, 바라밀의 완성이다. 그러니까 이 반야사상에서 대승불교가 정점에 오르는 겁니다. 반야사상이 더 극대화대면, 유식사상으로 가는 거야. 거기서 더 나가면 선으로 가는 거야. . 반야 공 - 유식 - 선 그러니까 원시불교 원래 형상주의가 아니였다는 것. 우연적 계기로 형상주의, 탑중심의 운동에서 불상으로 중국에 들어오고, 그게 우리나라까지 왔으나, 그 불상에 대한 그거를 거부하면서 다시 반야사상, 공사상. 그게 선까지 흘러가게 되었다.
정토신앙 -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성불할 것을 가르치는 종교운동.) 정토신앙은 아무것도 안해도, 오로지 아미타불(무한한 수명의 부처님)의 이름만 계속 외워도(=염불)서방의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주장
미륵신앙이나, 예수 재림한다는 거나, 뭐가 다름이 있어요. 대중신앙이 됨
대중화에 따른 여러 부작용은 불교의 본래 모습을 성실
너희가 곧 부처다. 이것을 극한까지 가면, 선
견성성불 : 너의 본성이 곧 부처임을 보기만 하면 너는 곧 부처가 된다
나는 본래로서 부처가 있게 되잖아요. 내가 있고, 곧 부처인데, 욕망에 가려져 있다. 그것만 걷어내면 곧 부처다. 이건 다시 아트만으로 가잖아요. 불성의 이론은 또 다시 아트만으로 빠질 위험성을 잉태한다
알라야식 : 오염된 것이며 소실되어야 한다.
여래장 : 오염되지도 않고 소실되지도 않는다.
알라야식연기에서는 깨달음의 계기가 밖에서 올 수 밖에 없다. 나의 존재는 알라야식이고, 이건 망식이다. 이걸 깨는게 바깥에서만 와야 하잖아.
여래에서는 그게 아니라, 내가 구유하고 있는, 내가 붓다니까, 깨닳을수 있잖아요.
대승기신론에 가면, 여래장론 특징이 염정상자 = 염정호훈 그러니까 그 여래장론은 여래장이 절대적으로 깨끗한 것으로, 나의 본성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여래장 자체가 물들 수 있다. 여래장경에서는 여래장의 오염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승기신론은 여래장 그 자체가 오염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여래장연기라는 말이 생겼다. 여래장 자체가, 이게 대승기신론의 독특한 것. 자체가 더럽게 물들여질 수 있다. 그래서 염과 정이 훈습한다.
일심이문 - 여래장론이 이게 염정이든 염이든 이것이 한 마음. 일심에는 진여문과 생멸문이 다 같이 있다. 일심 - 진여문, 생멸문 여래장을 볼 적에, 진여의 세계나 생멸의 세계나 결국하나라는 거에요. 제법의 염,정과 진,망은 둘이 아니요 하나다. 하나이기 때문에만 마음이다. 마음은 언어를 뛰어넘는다. 그래서 억지로 한마음이라 말할 뿐이다. - 원효 - 진여 생겨나고 멸하는 이런 세계에서 알아야식이 그러한 세계죠. 생멸문. 그러나 진여라는게 생멸의 배면에 있는 아주 변하지 않는 같은 진정한 내 마음. 변하지 않는 마음같이 보이잖아요. 생멸, 진여. 하나는 본체적인 것. 현상적인 걸로 봐서는 안된다는 거에요.
원효 - 진여에 아주 깨끗한 고요한 완벽한 여여한 마음이 있다라고 이것을 이원적으로 생각하면 불교가 아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람들에게 가능성으로 불성이지, 내가 부처다라는 오만을 가지면 안 된다. 이건 아트만론이란 말이에요. 여래장론은 성불의 가능성을 지적한 것이며, 나의 본성이 곧 부처임을 주장하는 존재론적 명제가 아니다. 원효의 일심사상은 여래장의 실체화를 거부한다. 대승의 여래장(불성)론은 실천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존재론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러니까 결국 뭐냐면, 원효 수준도, 일심이라는 것 자체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면 안된다는 것. 이건 반드시 실천을 위해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대승의 신을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 말씀하신 것뿐이다.
불성론은 중국에 들어와서 맹자의 성선론과 결합한다. 인간은 본래 선한 것이다. 내가 붓다다. 내가 구름만 걷히면 청청한 하늘이다. 위험한 사상이에요. 선, 그냥 그러면 좋다. 이러면 안되요. 선은 반불교적인 성격이 강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여기 굉장한 함정이 있어요. 오늘은 대승을 이해하고, 그 대승에서 이제 반야사상으로 이해가 되었잖아요. 반야사상 대표적인게 금강경.
불교가 이러한 여래장론으로 진행되면, 결국은 최후로 조주의 평삼심까지 오는게, 선의 세계이고, 직관의 세계이고 이것이 인간은 모두 불성을 구유하고 있다는 의식이 이런 평상심이 불성이다. 완벽한 인간의 평등주의가 오잖아요. 이게 불교의 종점이에요. (반야사상 - 알라야식론 - 여래장론 - 평상심 선은 철저한 인간평등주의 위에 서있다.) 깨달음의 가능성은 모든 인간에게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조주의 평상심이다. 불성 구유함으로 우리는 동일한 가능성의 존재라는 거에요. 동일한이 아니에요. 동일한 가능성. 이건 새로운 아트만이 아니라, 일심의 가능성, 거대한 우주적 에너지를 탯줄로 해서 태어난 존재. 우리의 모든 마음은 우주에 편재해 있는 법신을 탯줄로 하여 태어났다는 것이 여래장론의 평등사상이다. 여래장론을 통해 제시한 것. 대승운동 상당히 강력한 것이면서도, 소승의 입장에서는 반불교적, 비불교적인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깊게 알아야. 우리나라에 이런 반, 비불교적인게 통찰없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금강경은 슈라바스티(서울)에 세워진 기원정사(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서 이루어진 설법이다
‘기타태자의 동산(祇樹)에 급고독장자가 세운 승원(給孤獨園)’.기타(祇陀) 태자는 제타 태자의 중국어 음사다. 급고독(給孤獨) 장자는 수닷타 장자를 번역한 말이다. 수닷타 장자는 항상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자주 구제해 ‘아나타 핀다다’로 더 잘 불렸다. ‘아나타’는 ‘의지할 데 없는 자(孤獨)’란 뜻이며, ‘핀다다’는 ‘먹을 것을 주다(給)’란 뜻이다. 이를 한문으로 번역하면 급고독(給孤獨)이 된다.
예수는 죽을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한 인간으로서 죽었다. 바로 그러기에 그의 영원함이 있다. 웃는 예수가 되었다면 기독교는 피안, 내세, 초월만을 외치는 무당종교가 되었을 것
무명도 없고, 무명이 없어진다는 것도 없다. 깨달음도 없고, 깨달아질 일도 없으니, 고도 없고, 집도 없고, 멸도 없다. 4성제, 부처님 가르침인데, 부처 평생 가르친 게, 고집멸도가 다였잖아요. 고토의 원인이 있다. 고통을 멸하는 방법이 있다. 설하는데, 무슨 고통의 원인도 없다. 도대체 안다고 하는 것이 없다. There is no cognition, no attainment and no non-attainment. 뭘 얻어서 깨달음에 이른다도없어. 열반도 없으면, 윤회의 현실도 없는 거에요. 열반이 없으면 윤회도 없다. 우리는 자꾸 윤회라는 현실이 있고, 아름다운 세계로 간다. 부처님, 이 현실에서 열반이 따로 있다는 생각에서 버려야 니가 반야에 이를 수 있다. 윤회를 떠난 열반이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비로소 반야에 이를 수 있다.
그 러니까 하시는 말씀이 뭐에요? 대승불교, 생사즉열반이요, 우리의 죽고사는 현실이 즉 열반이요, 이 번뇌의 현실이 곧 깨닳음이란 거야. 그렇잖아요. 깨닳음이 없는데, 깨닳음이라는 건 번뇌가 있기 때문에 깨닳음이 있는 것이고, 깨닳음이 있기 때문에 번뇌가 있다는 거야. 웃긴 이야기야. 불교의 소승불교 모든 가르침을 싹 쓸어버리는 거야. 반야심경처럼 무서운게 없어요. anti-Buddhistic statements 반불교적 명제들 원시적으로 표현한것이 금강경. 나중에 반야심경, 금강경 태마를 명료하게, 도끼로 착착 부셔요. 대승운동의 위대한 것. 왜 그런가 하면서, 만약 보살이, 인살이 있고, 수자상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다. 이 세계를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것. 구세주의 의식이 있다면 이 세계를 구하지 못해요. 이게 기독교의 맹점이고 위대점이고 그래요. 구세주의 의식에 사로잡힌 자는 영원히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없다. 난 하나님의 아들 구원, 발심은 좋지. 자기를 죽여야지. 자기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로 나아있는 것은 안되요.
부 처님께서 난 평생 제도한다고 하였으나, 아무도 제도하지 않았다. 아상이 있으면, 제도할 수 없다. 얼마나 멋있어요? 현실적으로 종교의 위대성은 보시에 있습니다. 기독교도 많은 구제를 하고, 그러나 그러한 보시기관으로써 활약,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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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無我)
만물에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實我〕가 없다는 뜻으로 범어(梵語)로는 아나트만(Anātman), 팔리어(Pali language)로는 아나딴(Anattan)
참된 나인 아트만(ātman)을 주장(인도사상)하였으나, 석가모니는 아트만이 결코 실체적인 나〔我)〕가 아니며, 그러한 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불교의 무아윤회는 윤회의 주체로서 중유(中有)개념을 상정하였으며, 대승불교의 유식학(唯識學)에 이르러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대체되었다.
중유의 상속에 의한 윤회는 ‘온갖 번뇌와 업에 의해 오염된 온(蘊)에 의한 윤회’
불교의 무아설은 ‘나〔我)〕’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다. 무아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이름 아래 설명되었고, 무아의 생명은 무아의 실천이나 무아행(無我行)이라고 하는 실천적인 면에서 살아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성이 없는 무아이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무아성을 자각하여 수양하고 노력함에 따라 역경을 극복하여 더욱 향상할 수 있음을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이상인 열반은 무아성의 자각 아래 철저하게 무아행이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경지이다. 이 무아는 일반적으로 크게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로 나누어 설명되는데, 신라의 원효(元曉)는 그의 여러 저술에서 명쾌한 해석을 가하였다.
원효는 인무아를 외도(外道)나 범부(凡夫)들의 견해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외도나 범부는 몸과 마음을 한결같이 주재하는 영구불변의 주체가 있다고 보고 이를 ‘나〔我)〕’라고 하나, 우리의 몸과 마음은 오온이 가정적(假定的)으로 화합해 있는 것일 뿐, 특별한 주체라고 인정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인무아’라고 한다고 하였다.
법무아는 소승(小乘)의 수행자들이 갖는 그릇된 집착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모든 대상의 법에 대하여 실아(實我)가 있고 실법(實法)이 있다고 그릇 생각하여, 갖가지 현상들에 대하여 상주하고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하지만, 실은 모두가 인연의 화합으로 생긴 가법(假法)일 뿐, 따로 그 현상들을 있게끔 하는 법아(法我)가 없는 까닭에 ‘법무아’라고 한다고 하였다.
또 실천적인 면에서 볼 때 무아는 무소득(無所得)과 무가애(無罣碍)라는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무소득이란 집착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我〕와 자기 소유물〔我所〕에 대하여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고정불변할 것을 원하여 이를 집착하게 된다. 이와 같은 아집(我執)과 아소집(我所執)이 없는 것이 무소득이다. 무가애는 무애(無碍)라고도 하는데, 장애와 정체됨이 없이 자유자재한 것이다. 이것은 무소득의 무집착이 진전하여 완성된 상태를 가리킨다.
불교사에서 볼 때 무아라는 말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차차 공(空) 또는 공성(空性)이라는 말로 바뀌어 사용되었고, 선종(禪宗)에서는 무(無)라는 말도 무아의 뜻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원래 아집(我執)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했던 무아의 가르침은 뒤에 어떠한 것도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가르침으로, 마침내는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립의 소멸과 해탈로 발전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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