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짧은 역사(2)
Nasica
폴란드는 1794년 코시우스코 (Andrzej Tadeusz Bonawentura Kosciuszko)의 봉기가 러시아 군에 의해 진압된 뒤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에 의해 완전히 국가로서의 존재가 사라진지 약 10년 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폴란드 인들은 조국을 갈갈이 찢어 나눠가진 주변 강국들, 즉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그리고 러시아에 대해서는 깊은 원한을, 그리고 이들을 차례로 꺾으며 진격해온 프랑스에 대해서는 적의 적이면 나의 친구라는 우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프랑스라는 국가의 위대함이 개인의 모습으로 발현된 존재였던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요즘의 인기 연예인 또는 스포츠 스타 이상의 전율을 느끼고 있었지요. 어쩌면 이 프랑스 황제가 폴란드의 독립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으니까요. 폴란드 인들의 이런 열기는 1807년 1월 1일, 휴식과 행정 업무 처리를 위해 바르샤바로 들어오는 길이던 나폴레옹에게도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나폴레옹 군 내에서 서열 2위 정도에 해당하는 뮈라 (Murat)가 1806년 말 바르샤바에 맨 처음 들어와, 독립에 대한 청원을 하는 폴란드 귀족에게 둘러 싸였을 때, 뮈라는 '프랑스는 한번도 폴란드 분할을 승인한 적이 없다, 폴란드가 자기 자신을 지킬 용기를 증명해 보인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라는 정도의 아리송한, 그러나 긍정적인 립 서비스를 폴란드 귀족들에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뮈라에게 '쓸데없는 말을 했다'며 뮈라를 크게 질책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를 독립시킬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처음부터, 프로이센이나 러시아와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단순 무식한 장군이 아닌, 노련한 정치가이자 지식인이었던 그는 프로이센 정도의 2류 국가야 가볍게 밀어버릴 수 있을지 몰라도, 러시아와 같은 대국은 싸우기 보다는 화친해야 할 상대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폴란드 독립을 선언한다는 것은, 폴란드 분할 때 그 영토의 가장 큰 부분을 떼어갔던 러시아와 갈 때까지 가보자는 소리 밖에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관록의 제국 오스트리아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설령 프로이센이 차지한 폴란드 땅만을 대상으로 독립 폴란드를 선언한다고 해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 점령된 폴란드 영토에서도 소요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를 위해 프랑스의 피를 흘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비록 독립국가는 아니었지만, 폴란드 귀족들의 독립에 대한 염원은 바르샤바 공국 (Duchy of Warsaw)으로 구현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이 점거했던 폴란드의 옛 영토를 기반으로, 바르샤바 공국을 세워 준 것입니다. 이 공작령(duchy)라는 것은 왕이 아닌 공작이 다스리는 땅으로서, 자치권을 가진 독립된 지역이긴 했으나, 외교권과 같은 독립 국가가 누려야 할 외교권이 없었습니다. 공작이 다스리는 땅이니 이 나라의 주인인 공작이 있을텐데, 그건 누구였을까요 ? 당연히 아들 없이 사망한 전 국왕 스타니슬라브 2세 (Stanislaw August Poniatowski)의 친조카이자 이름난 장군이었던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가 적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도면밀한 나폴레옹은 전혀 엉뚱하게도 작센의 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1세 (Frederick Augustus I of Saxony)에게 폴란드 공작이라는 작위를 새로 부여하고, 작센의 왕이라는 직위에 더해 이 바르샤바 공국의 주권자로 임명합니다. 이는 작센 왕국에게 바르샤바 공국을 떼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작센 왕이 개인적인 직위와 영토를 따로 갖는 형태였지요. 간단히 말해서, 작센 왕 아우구스투스는 명의만 빌려주는 바지 사장인 셈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왜 포니아토프스키를 따돌리고 이런 조치를 취했던 것일까요 ?
포니아토프스키가 특별히 나폴레옹에게 밉보였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보다 먼저 뮈라와 만났었는데, 매우 용감한 군인이자 젋어서 오스트리아 군에서 장군까지 지냈던 진짜 귀족 포니아토프스키는 뮈라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었고, 뒤이어 만난 나폴레옹에게도 무척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물이 바르샤바 공국의 실질적인 주인이 된다면 그건 주변국에 대한 도발이 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이 바르샤바 공국이 포니아토프스키의 지휘 하에 정말 제대로 된 국가 형태로 발전해 나가는 것을 나폴레옹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바르샤바 공국을 세운 것은, 폴란드 귀족들의 독립 국가에 대한 염원을 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필요할 때마다 병력과 자금을 뽑아 쓸 수 있는 전진기지를 동부 유럽 한복판에 건설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바르샤바 공국이 설립되면서, 폴란드 귀족들의 자존심은 충족되었을지 몰라도, 그 자존심의 댓가는 상당했습니다. 그 댓가는 끊임없는 전쟁과 재정난으로 다가왔지요.
원래 폴란드는 러시아, 독일, 오스만 투르크 등 주변에 워낙 강적들이 많았고 게다가 폴란드 내부에서도 귀족들간의 내전이 잦아 크고 작은 전쟁이 많은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국민들의 전쟁 경험이 많을 것 같지만, 의외로 폴란드는 인구 대비 병력의 비율이 상당히 작은 나라였습니다. 아직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전인 1781년 경, 유럽 주요 국가의 성인 남성 인구 대비 훈련된 병력의 비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폴란드 1/472
프랑스 1/153
오스트리아 1/90
러시아 1/49
프로이센 1/26
프로이센 같은 경우 워낙 군국주의가 판을 치는 나라이고, 러시아는 카자흐처럼 세금 대신 수년간 짜르의 군대에서 기병으로 복무를 해야 했던 유목 민족의 존재 때문에 이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게 나타났다고 쳐도, 폴란드는 비교적 평화로운 프랑스에 비해서도 이 비율이 지나치게 적은 편이었습니다. 대체 폴란드처럼 전쟁이 많았던 나라에 이게 어찌된 일이었을까요 ?
그 이유는 폴란드의 낙후된 사회 구조 탓이 컸습니다. 미국 역사가인 슬로안 (Sloan)이 당시 폴란드 인들에 대해 '폴란드 인들은 멍청하고 게으른 촌뜨기 아니면 쾌락에 탐닉하는 우아한 귀족들이다'라고 쓰기도 했듯이, 폴란드는 중산층 시민 계급이 발달하지 않은, 지배층 귀족들과 피지배층 농민들의 격차가 큰 신분 사회였습니다. 원래 전쟁을 담당했던 귀족들은 당연히 날개달린 후자르 (winged husaar)의 로망을 잊지 못하고 귀족스러운 기병의 육성에만 심혈을 기울였지요. 덕분에 폴란드의 창기병 울란 (Ulhan, 폴란드 창기병의 전성시대 http://blog.daum.net/nasica/6862375 참조)은 유럽 전역에서 명성이 자자했지만, 그런 일류 기병들만으로는 폴란드를 지킬 수 없었습니다. 특히 18세기 중반 이후의 전장은 잘 훈련된 보병과 포병이 지배했기 때문에, 기병 위주의 군사력은 낡은 시대의 유물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하고 케케묵은 폴란드 귀족들은 기병을 포기하고 냄새나는 농민들을 긁어모아 군사 훈련을 시키는 것이 귀족의 체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요.
게다가 폴란드의 지배층인 귀족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근대 시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낡은 사상에 젖어 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폴란드 귀족들은 '폴란드 인이여 단결하라'를 외칠 때, 그 폴란드 인이라 함은 어디까지나 폴란드 귀족들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 전체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은 폴란드 인이라고 인정하지도 않았지요.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농민들도 폴란드 국민이라고 인정한 것은 제2차 폴란드 분할 바로 다음 해인 1794년 코시우스코(Kosciuszko) 봉기 때 코시우스코 장군이 선포한 폴라니에치 (Polaniec) 선언문이 최초였습니다. 이때 많은 농민들이 코시우스코 봉기에 가담했는데, 이들은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고작 풀베는 큰 낫 등으로 무장한 상태로도, 러시아 군과 싸워 이기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병력과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은 패배하긴 했으나, 이렇게 1년 반 동안이나 러시아 군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코시우스코가 내건 구호, "Gli uomini liberi sono fratell" 즉 자유인은 모두 형제다 (Free men are brethren) 라는 평등 사상이 폴란드 농민들에게 희망과 애국심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폴란드 농민들은 세금을 걷어가는 사람들이 폴란드 귀족이건 러시아 귀족이건 사실 별 상관이 없었으므로 뾰족하게 지킬 것도 없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이렇게 근대 계몽 사상에 입각한 자유와 평등이 어떤 위력을 가지는지 이해 못했던 귀족들 때문에 결과적으로 넓은 영토와 결코 적지 않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의 군사력은 그다지 위력적이지 못했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3차례에 걸친 폴란드의 분할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러했던 폴란드 인들의 군사력을 완전히 프랑스 식으로 환골탈태를 시켜놓습니다. 그는 바르샤바 공국을 세우고 자신이 작성한 바르샤바 공국 헌법을 선포함과 동시에, 21세부터 28세 사이의 모든 남성들이 6년 동안의 의무 복무를 하도록 징집제를 실시합니다. 그러나 이런 징집제는 폴란드의 자유를 수호하기 보다는,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가령 처음에 약 2만이 넘는 병력으로 시작한 바르샤바 공국의 군대는 징집 서류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1807년 8월, 각 사단 중 가장 훈련과 장비 상태가 좋은 연대를 뽑아 머나먼 스페인으로 파병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어서 벌어진 러시아와의 전투에서도 적극 활용되어 2천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야 했습니다.
폴란드 인의 피를 흘려야 한다면 최소한 그 싸움이 폴란드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또 참전할지 말지 여부를 폴란드 인들이 결정해야 할텐데, 바르샤바 공국 중 어느 누구도 그 결정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미 결정된 내용이 파리에서 파견된 프랑스 대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통보되었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 폴란드 인들은 자신들의 기묘한 반쪽짜리 나라가 '작센 왕에, 프랑스 법에, 프로이센 화폐에, 군대만 폴란드 인들로 채워져 있다' 라고 씁쓸한 농담을 주고 받았습니다. 이런 병력 착취는 점점 정도가 심해져서, 1812년에는 전체 인구가 430만 밖에 안되는 작은 공국에서 무려 10만이 넘는 병력이 나폴레옹을 따라 두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러시아로 떠나야 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전체 성인 남성 중 군사 훈련을 받은 인구의 비율이 1/472였던 나라에서, 이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체 인구의 1/43이 현역으로 복무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는 당연히 엄청난 젊은이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르샤바 공국의 국방부 장관직과 프랑스 군의 원수직을 겸직하던 포니아토프스키 본인의 목숨까지도 결국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희생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나폴레옹의 수탈은 젊은 남자들을 병사로 끌고 가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워낙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에 끌려 갔으므로 농업 생산력이 떨어졌고, 게다가 대륙 봉쇄령에 의해 곡물 수출길이 막히자 당장 경제도 어려워졌습니다. 거기에 한술 더떠 나폴레옹은 그야말로 벼룩의 간을 빼먹는 짓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즉, 1807년 틸지트 (Tilsit) 조약에서 프로이센으로부터 뜯어낸 전쟁 배상금 채권을, 당장 현금이 필요하다면서 폴란드에게 채권깡을 해서 넘긴 것입니다. 즉, 바르샤바 공국에게 이 4천3백만 프랑 상당의 채권을 2천1백 프랑의 현금을 받고 넘겼습니다. 어떻게 보면 좋은 투자를 한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좋은 투자라면 나폴레옹이 폴란드에게 넘길 리가 없었겠지요. 이 채권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빚을 진 프로이센이 빚을 제때 갚을 능력이 되어야 했지만, 패전의 충격에서 헤어나기 위해 허우적거리던 프로이센은 이 빚을 갚지 못했습니다. 이는 곧장 신생 바르샤바 공국을 재정 공황 상태에 빠뜨렸고, 폴란드 인들은 심각한 인플레와 과중한 세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은 화려한 바르샤바에 입성하였지만 그의 그랑 다르메 (Grande Armee) 병사들은 움막처럼 초라한 폴란드 농가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1806년 11월 말에 폴란드에 들어서면서부터,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진흙탕이 된 도로에서 그의 병사들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 자신도 바르샤바를 향해 이동하면서, 그가 탄 마차가 시도 때도 없이 진흙탕에 차축까지 빠지는 바람에 자주 마차에서 내려야 했지요. 그는 곧 겨울이 올 것이고, 그럴 경우 병사들의 군화는 이런 환경에서 고작 10일 정도 밖에는 못 버틸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후방으로 보낸 무수히 많은 편지 속에서 '무엇보다 군화가 필요하다, 만약 군화를 보낼 수 없다면 현지에서 만들 수 있도록 가죽이라도 보내라'는 훈령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두가지입니다. 첫째, 폴란드가 정말 가난한 땅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지난 편들에서 여러 병사들의 불만과 장교들의 기록을 통해 보실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전쟁을 스스로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원칙을 지켰던 나폴레옹이 본국에다 '가죽을 보내라'고 SOS를 친 것을 보면, 폴란드 땅에서는 가죽도, 그 가죽을 만들 가축도 별로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차피 나폴레옹이 요청한 물품은 군화든 가죽이든 결국 도착하지 않을, 최소한 제때 도착하지 않을 가능성이 무척 크다는 것입니다. 군화나 가죽은 나름 무거운 물건이고, 병사들이 야전에서 10일마다 갈아신어야 할 정도의 분량이라면 상당한 무게였을텐데, 그런 화물이 폴란드의 진흙길을 뚫고 제때 도착했을 것 같지가 않거든요. 이때 만약 북쪽의 단치히 (Danzig) 항구가 프랑스 손에 있었다면 그런 물자 수송이 좀더 쉬웠겠으나, 단치히 항구는 아직 프로이센군이 지키고 있었고, 게다가 바다는 영국 해군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보급 부족에 시달리던 나폴레옹은 이 항구에 축적된 식량과 물자를 탈취하기 위해서라도, 나중에 폴란드 사단과 이탈리아 사단으로 르페브르 (François Joseph Lefebvre) 원수 하에 제10군단을 편성하여 이 단치히를 포위 공략, 결국 함락시킵니다. 그건 몇달 뒤인 1807년 5월 이야기입니다.
아일라우 (Eylau) 전투(1807년 1-2월) 이후의는 프랑스 및 러시아 양측 모두를 질리게 만들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아일라우의 승자로서 체면을 세우려는지, 쾨니히스베르크를 향해 후퇴하는 러시아군을 추격하며 몇군데에서 소규모 전투를 벌였는데, 2월말 즈음해서는 정말로 동계 작전을 포기하고 겨울 숙영지로 후퇴했습니다. 이들이 아일라우의 악몽에서 벗어나 다시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한 것은 그해 여름이 거의 다 되어서였습니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이 결코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럽 전체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미 여러차례 언급했지만, 나폴레옹이 여태까지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전술 비결을 몇가지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빠른 행군을 위해 보급은 현지 조달로 대체
2) 그를 위해 행군시에는 분산 이동
3) 결전 시에는 신속한 집결로 전장에서의 수적 우위 확보
그런데 도로망이 열악하고 농민들의 살림이 가난한 폴란드에서는 이런 전법이 전혀 먹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훗날 스페인과 러시아에서 다시 벌어지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이날의 전투로 뭔가를 배웠다면 스페인이나 러시아에서는 싸우지 않고 어떻게든 화평을 했을텐데, 이미 나폴레옹도 뭔가 교훈을 배우기에는 너무 자아가 커져 버린 모양이었나 봅니다. 또한, 그의 그랑 다르메를 이루던 근간인 불로뉴 병영의 베테랑들이 이날 전투에서 대거 희생됨으로써, 그의 그랑 다르메가 별로 훈련도 받지 못한 신병들로 채워지면서 질적인 저하가 시작되었다는 점도 큰 문제였습니다. 무엇보다, 여태까지 나폴레옹을 믿고 따르고 사랑했던 장교들과 병사들이 폴란드 전역을 치르면서 그의 면전에서 투덜거릴 정도로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이 그의 미래에 불길한 그림자를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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