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연맹학살
https://v.daum.net/v/20231222125102215
국군등 한국의 민간인 학살
보도연맹 학살사건(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등), 형무소 재소자 학살(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등), 부역 혐의 학살(고양 금정굴 학살사건 등)등. 학살 외의 전쟁범죄로는 한강 인도교 폭파, 소년병 징집, 국민방위군 사건 등이 있다. 학살을 저지르는 한국군 및 한국 경찰을 유엔군이 저지하여 목숨을 건진 케이스는 있다. 영국군이 서울 홍제리 집단총살 사건 당시 추가적인 학살을 막은 사례 등. 대전 골령골 학살의 경우 한 지역에서만 7000명
공격자나 범죄자 혹은 무고한 사람들에 대해 거의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북한의 사악함과 국군의 영웅적 희생을 강조하기 위해 냉전이 끝날 때까지 은폐
50년 7월 인민군에게 협조의심되는 사람들을 미리 학살하고 후퇴.'보도연맹’ 학살
미래의 ‘부역죄’를 저지를 사람을 예상하고 선제적으로 처형(약2만)
50년 9~10월
첫째 시기에 학살당한 희생자의 유족들이 인민군과 손잡고 군경의 가족에게 보복 학살
인천상륙 작전으로 반격에 나선 국군이 인민군에게 협조했다고 지목된 사람들을 학살(악7500)
셋째는 51년 1월
미군의 전략적 폭격, 초토화 폭격. 폭탄을 투하해서 단번에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음.(약3000)
미국의 민간인 학살
서울 일대 폭격으로 1950년 6월부터 9월까지 4,280명의 서울 시민이 사망했는데 이는 서울시 사망자의 24.8%다. 이는 서대문구, 중구, 용산 같은 인구 밀집 지역에 폭격을 했기 때문이다. 폭격기나 전투기 조종사가 쓴 비행 일지가 드러나며 밝혀졌다.
미군은 국군, 북한군, 중국군은 물론이고, 미군 스스로가 저지른 학살까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 모조리 사진과 자료로 남겼다. 미군의 대표적인 학살 사건은 제1기병사단이 했던,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미국이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에 깊이 개입.
북한의 민간인 학살
체포하거나 납치한 인물들을 형식적 재판 이후 공개적으로 처형했다. 기업인, 교육자 정치인, 대한민국 군경 및 공무원 가족 등 북한과 좌익세력에 의해 반동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이었다.
이외에도 서울대병원 학살사건, 서천등기소 학살 사건,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 함흥시 학살 사건 등 인민재판이라는 형식적 절차조차도 없이 자행한 학살들도 빈번함 (50년9월 퇴걱하며 5000명)
또한 안재홍, 김규식, 조소앙, 정지용, 손진태, 박열, 정인보, 이광수, 방응모 등 유명 인사들을 납북하였다. 납북자의 88.2% (84,659명)가 6.25 전쟁 발발 이후 3개월(1950년 7월~9월) 동안에 납북
<한국전쟁의 기원>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토지개혁과정에서 지주들이 남쪽으로 피신하게 내버려두거나 농지를 경작하기를 원하는 경우 고향이 아닌 다른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북한이 한국의 공무원, 경찰, 우익 청년단체 지도자 그리고 미국에 고용되었던 사람들을 처형. 초기의 처형은 대개 감옥에서 풀려난 좌익들의 한 풀이에서 비롯됐으며, 처형된 이들 대부분은 과거 북한에서 달아난 식민지 경찰, 서북청년단에 가입한 북한 지주의 아들, 한국 지주와 자본가의 아들, 식민지 정부에서 비교적 높은 직책에 있었던 자들이라고 주장. 즉 일부 학살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는 것이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실증주의 집착)
학살의 71%는 남한의 군대와 경찰이, 15%는 미군이, 14%는 북한 인민군과 동조세력
혐오 정서 -> 혐오 발화 -> 혐오범죄 -> 대량 학살로 나아가는 ‘혐오 피라미드’

유엔군(특히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과 우익 세력,적대세력(북한군과 중공군, 소련군, 좌익 세력)에 의한 학살.전투로 인한 군인, 민간인 희생자를 제외하고 순전히 ‘학살’당한 민간인.
1960년 4.19 직후에 활동한 전국유족회는 자체 조사를 통해 피학살자의 수가 약 114만 명(서울/2만, 경기/6만, 충남/3만, 충북/5만, 전남/21만, 전북/19만, 경남/25만, 경북/22만, 강원/3만, 제주/8만)이라고 주장한 바 있지만, 당시의 유족회 자료를 5.16쿠데타 세력이 모두 수거해가 그 근거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후 민간(대학교수 등 전문가 및 시민사회 활동가)에서 실태조사 및 자료추적을 통해 추산한 피학살자의 수가 약 100만에 이른다.
스탈린은 6·25 전쟁 중 인민재판에 대한 정보를 전파받자마자 "김일성 동무는 이 미친 짓을 중단하지 않고 무얼 하는 건가?". 그도 그럴 것이 공산군이라는 집단은 인민의 협조를 얻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집단인데 그 인민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짓을 하는 건 정신나간 행태이기 때문.
김학준: (대표 저서 "김학준. 『한국전쟁: 원인, 과정, 휴전, 영향』. 서울: 전영사. 2010.") 1980년말 6.25 전쟁에 대한 미국 학계의 연구 성과를 국내학계에 소개하였다. 이 것만으로 엄청난 것이었다. 1980년 계간 현대사가 폐간된 일로 한국 학계에서는 6.25 전쟁을 금기시해 왔는데, 그 터부를 깨트렸기 때문이다. 기존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 수준이고, 정교한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https://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948768
https://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949120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682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448
민간인학살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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