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덴시안의 개혁과 신앙의 자취
이 병길 목사
글 순서
발덴시안 개혁의 시대배경
발덴시안 역사의 주요 사건들
사도적 전통 발덴시안의 세 가지 원점
발덴시안의 지도자 피테르 발도
발덴시안의 주요 교의
발덴시안의 루브롱 대학살
발덴시안의 16세기 개혁운동에 합류
맺는 글
2015년 6월22일, 제266대 프란체스코 교황(Papa Francesco, b.1936)이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삐에몬떼(Piemonte, 프랑스어 ‘피에몽티’ ) 주 토리노(Torino)를 방문했다. 세계 언론들은 교황의 토리노 동선을 앞 다퉈 기사화 했다. 토리노는 이탈리아 계 아르헨티나 출신 프란체스코 교황의 아버지와 조부모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론들이 다룬 교황의 토리노 방문 주요 기사는 따로 있었다. 교황은 토리노 방문 이튿날 로마천주교 교황으로서는 처음 이례적으로 토리노의 발덴시안 교회(Waldensian Church, 이하는 ‘발덴시안’)를 방문, 그곳 교회의 에우제니오 베르나르디니(Eugenio Bernardini) 목사와 포옹하면서, 지난 날 ‘로마천주교의 비(非) 그리스도인 적이고 비인간적’(non-Christian and inhumane) 태도와 행위를 한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구했다. 이어서 교황은 ‘과거에 우리들 관계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신앙의 이름으로 저지른 폭력과 갈등을 보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죄인임을 인식할 수 있고 서로가 어떻게 용서해야 할 지 알 수 있는 은총을 주시도록 주님께 청해야 한다’(On behalf of the Catholic Church, I ask forgiveness for the unChristian and even inhumane positions and actions taken against you historically,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Christ, forgive us; REUTERS. Mon JUNE 22, 2015)라고 했다.
지난 날 로마 천주교는 발덴시안을 이단(異端)으로 정죄하고 파문했다(1487). 그로부터 831년 만에 로마천주교 교황이 발덴시안 교회를 방문한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뜻 깊은 뉴스원이 되었던 것 같고, 특히 언론의 관심 초점은 전 세계 12억 로마천주교 인구의 수장인 교황이 불과 30,000명의 인구를 가진 발덴시안 교회를 방문하여 과거의 잘 못한 일에 대하여 ‘용서’를 구했다는 것이다.
언론은 교황의 이런 과감한 행보에 대하여,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에 즈음하여 기독교의 연합 홍보의 일환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프란체스코 교황의 전임자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는 2000년 역대 교황으로서는 처음 예루살렘을 방문, 그곳 통곡의 벽 앞에서 수세기 동안 로마천주교에 의해서 박해받은 유대인들에게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발덴시안(Waldensian)의 선인(先人)들은 사도적 전통을 따라서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었다’(They lived and died for their faith). 역사적으로 발덴시안은 모진 고문과 추방 및 순교를 거듭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지켰다. 그들은 이탈리아의 알파인 계곡(the Alphine Valleys)에서부터 미국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산기슭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그들의 신앙의 발자취가 곧 그들이 어떻게 믿음을 지켰는가를 보이는 살아있는 ‘얘기’(their story)가 될 것이다. 발덴시안은 성경이 모든 사람에 의하여 해석되고 온 세상 사람에게 그 메시지가 공유되게 하기 위해 열려있는 것으로 믿었다. 수 세기에 걸쳐서 발덴시안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사랑을 공유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에 헌신 해 왔다. 그들은 평화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가끔은 그들 자신의 신앙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 때는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박해자들에게 체포와 죽임당하는 일에 대비해서는 비밀 예배를 원칙으로 했으며, 그들의 유일한 생활 준칙인 성경이 박해자들에게 빼앗기거나 소각(燒却) 될 어느 날을 대비 하여는 평소 성경을 외우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 글은 발덴시안의 ‘신앙의 자취’(Waldensian Trail Of Faith)를 통하여 교회개혁의 정체성을 되짚는 데 그 의미를 둔다.
발덴시안 개혁의 시대배경
역사상 12, 13세기는 로마천주교의 전성기로 간주된다. 당 세기는 로마천주교의 정치, 교권, 경제에 이르기까지 미증유의 절정에 달했으며, 다른 한 편 로마천주교의 부패 역시 극치에 달하고 있었다. 교회가 세속화된 상황에서도 간헐적 개혁의 미동(微動)은 감지되었다. 마르틴 루터(M. Luther, 1483-1546), 쯔윙글리(U. Zwingli, 1484-1531), 존 칼빈(J. Calvin, 1509-1564)의 개혁에 앞서서, 영국에서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3-1384)는 교회의 부패와 교황과 사제들의 권위주의를 지적했고, 체코에서 존 후스(John Hus, 1369-1415)는 ‘성직자’의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이탈리아의 사보나롤라(Savonarola, 1452-1498)는 교황과 부자들의 사치에 대한 회개를 촉구했으며, 스위스에서는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가 이성적 판단과 지적에는 예리하였으나 개혁 행동에는 소극적인 면을 보였다.
이러한 유럽의 상황에서 프랑스의 리용(Lyon)에서 불붙기 시작한 발덴시안의 개혁의 불씨가 들불처럼 번져나간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로마천주교의 교세(敎勢) 확장과 교황 권 신장(伸長) 확립이 극에 달했을 때 발덴시안은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당시 시대 배경을 고려할 때 발덴시안의 개혁은 한 마디로 무모했다. 심지어 개혁과정에서 미세한 균열까지 보이는 가운데 보수적 발덴시안이 개혁 대열에서 이탈하여 로마천주교로 다시 회귀하고, 개혁 지향적인 ‘복음적 급진주의’(Evangelical Radicalism) 발덴시안은 더욱 강한 의지로 결속되기도 했다. 당시 로마천주교는 돈과 교권 지배의 극치로 교회의 위치와 기능을 이미 상실했으며, 특히 ‘성직자’(Clergy)들의 사치와 세속화는 사도들의 삶과는 전연 상치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덴시안은 청빈생활, 가정 집회, 순회전도, 성경공부, 성경의 계시를 따라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삶을 방양 본 딴 공동체로 발전했다. 그러나 발덴시안은 로마천주교로부터 ‘비기독교적’이고 ‘비인간적’인 박해를 받았으니, 그 대표적 사건이 바로 1655년에 있었다. 일부 사가들은 발덴시안의 개혁을 중세의 ‘암흑기’를 비췬 한 가닥의 빛이라고 하였으며, 개혁의 선구라고도 했다. 때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1536년 존 칼빈의『기독교강요』출판과 프랑스의 위그노(Huguenot)개혁운동 전 350여년 즈음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발덴시안 역사의 주요 사건들
1173-1176 라틴어 성경을 프랑스 남부 방언으로 번역, 마가복음 10:21「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성경을 따라 모이고 흩어져서 전도하다.
1179 발덴시안이 서로 형제와 자매가 되어 복음 전도와 청빈생활로 결속되다.
1181 리옹(Lyon)의 대주교가 발덴시안에게 성경강해를 금지하다.
1184 베로나(Verona) 회의에서 파문당하다.
1208 일부 발덴시안의 로마천주교로의 회귀와 발덴시안이 청빈운동에 참여하다.
1214-1215 발덴시안 두 번째 이단으로 지목되어 박해를 받다.
1218 베르가모(Bergamo) 대회를 소집하고 발덴시안의 교의를 검토하다.
1229 툴루즈(Toulouse) 회의에서 ‘평신도’의 성경 구매 및 번역 성경 구매 금지 선포와 동 시에 이단 처리를 위한 종교 재판소설치를 결의하다.
1398 로마천주교의 각종 의식과 유형(有形)한 형식을 거부하고, 방언사용을 금지당하다.
1488 삐에몬떼(Piemonte) 등지에서 습격을 받다.
1532 발덴시안이 개혁교회와 합류, 방언으로 성경 번역, 이에 분노한 로마천주교가 군대 를 동원하여 공격하다.
1560 1559년부터 갈리칸 신앙고백서(Gallican Confession) 채택하다.
1655 피에몬떼(Piemonte) 지역의 발덴시안이 부활절 새벽에 습격으로 1712명 학살되다.
1685 프랑스 루이 14세의 군대가 대량 학살, 잔류 발덴시안 200여명으로 감소되다.
1686 발덴시안이 이탈리아로 이동, 일부는 스위스의 알프스 산속으로 숨어들다.
1814 이탈리아 북부의 프랑스 국경지대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다.
1870 전 세계 보편적 종교자유 원칙에 의하여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을 보장받다.
1937 남미 이주 발덴시안 인구 15,000명에 달하다.
현재 이탈리아의 발덴시안 인구 2만~3만여 명에 이르다.
사도적 전통 발덴시안의 세 가지 원점
발덴시안은 ‘빛은 어두움에서 빛난다’(The Light Shines In Darkness)라는 개혁 표어를 가지고 행동에 임했다. 발덴시안은 그들의 신앙이 사도적 전통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의 신앙은 기원 후 58, 59년 경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알프스 산맥과 유럽 지역 순회 중 이미 뿌려놓았을 사도들의 순수한 복음의 씨가 발아(發芽)하여 생성한 것으로 믿으며. 또 다른 한 가지 역사의 원점은 클라우디우스(839A.D.)의 순교에 두고 있다.
1805년 나폴레옹이 한 발덴시안 교회 운영자에게 평소에 가졌던 깊은 관심의 질문을 던졌다. ‘발덴시안 교회가 하나의 독립교회가 되기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걸렸느냐?’ 운영자는 ‘토리노 주교 클라우디우스 때부터’라고 거침없이 대답했다.이 대답은 발덴시안의 역사적 원점(原點)이 클라우디우스 주교의 순교에서 시작되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스페인 출신의 클라우디우스는 교황권이 절대 권위로 작용하던 제도권 영역에서 교황 권에 저항하여 ‘성자예배, 화상예배, 로마 특권’에 반대하다가 화형에 처해졌다. 중세 시대 로마천주교의 제도권 내에서 로마천주교의 비성경적 제도의 오류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렸다. 이를테면 카타르파(The Cantharis), 롤라드파(The Lollards), 후스파(The Husssites), 알비파교(Abigensianism) 등은 발덴시안과 거의 같은 시대에 생성되어 개혁의 목소리를 내었다.
발덴시안은 그들이 중요시하는 공동체 원점의 다른 하나는 1120년에 제정된 것으로 보이는 발덴시안의 신앙고백서(The Waldensian Confession of Faith, Circa 1120)이다. 발덴시안 교회는 이 고백서가 칼빈, 마틴 루터, 피테르 발도(Peter Waldo)가 제정한 것보다 선행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발덴시안에게 신앙고백은 성경 우위에 선점(先占) 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다만 발덴시안은 로마천주교가 만든 유전과 전통이 성경과 상치되거나 조작이라 비판하고, 순수한 성경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강렬한 저항적 노력과 비성경적 제도와 전통으로부터 순결한 신앙 사수를 위해 순교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헌신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신앙에 뿌리를 둔 발덴시안은 결국 1165년 로마천주교의 박해에 몰려 알프스산맥 깊은 계곡 피에몬떼(Piedmont)로 흘러들어 그곳에서 함께한 신앙의 동류들과 서로 덕을 쌓으면서 형제애를 확인했으며, 1532년 샹포란(Chanforan)에서 개최된 발덴시안 총회에서 존 칼빈의 개혁에 합류했다.
발덴시안의 지도자 피테르 발도
앞에서 발덴시안 신앙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로부터 전승된 것이라고 언급한 것은 발덴시안의 역사적 기원이 어떤 인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사도적 신앙이 누군가에 의하여 모닥불로 집혀졌고, 그 불길이 번지게 된 것을 뜻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발덴시안의 창시자는 그리스도요 사도들이라는 말이다. 다만 발덴시안의 공동체 구성에 누군가는 먼저 헌신했을 것인데, 그가 바로 프랑스의 리용(Lyon) 출신 피터 발도(Peter Waldo, 1140-1217)이다. 그러나 발도에 대한 공유할 수 있는 확실한 역사적 자료는 거의 찾기가 어렵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발도가 12세기 경 프랑스의 산업도시 리용(Lyon)에서 고리대금업으로 부유한 상인이었다는 것과 그 돈의 힘으로 프랑스 남부에서 막강한 영향을 행사했던 바로 그가 성경 진리를 깨달으면서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발도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경위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과 설(說)이 있다.
그 중 비교적 주목할 만한 것은, 사회적 부와 힘을 가진 발도가 제도적 교회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어느 날, 발도 자신이 사제(司祭)에게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청빈한 삶을 본받을 수 있는 비결을 물었다고 한다.그 때 사제가 발도에게 소개한 성경이 바로 마태복음 19:21절이라고 하는데, 이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희구하는 한 부자 청년에게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고 한 내용이다.
발도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의 질문에 대한 정답이라 깨닫게 되었고, 그 때부터 삶의 변화를 가져왔다. 발도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본받기 위하여 로마 원로원의 아들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에데사의 성 알렉시우스(St. Alexius of Edessa, Alexis of Rome)가 에데사 어느 성당에서 기거하면서 ‘하나님의 사람’(The Man of God)으로서 청빈의 덕을 쌓았던 빈자의 삶을 흠모했다.
때는 1176년 그의 나이 30세 쯤 되었을 때, 발도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삶을 본받기 위하여 자신의 재산 일부를 부인을 위해 안배하고, 두 딸은 수녀원에 보냈다. 그리고 발도는 남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성경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변화 후 발도가 먼저 착수한 것은 성경 번역이었다. 그 때까지 일반 신도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라틴어 성경을 프랑스 남부 토속어로 번역하여,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영적 깨달음을 체험한 발도에게는 그 불가능을 가능한 현실이 될 수 있게 한 것이다. 불가능한 상황에서 가능한 현실을 만든 원동력은 성경에 대한 심오한 영적 깨달음이었고, 그 깨달음의 확신이 자기희생으로 이어진 것이다.
발도는 ‘성인’(聖人)과 사제의 협조를 얻어 자신의 사비로써 라틴어 신약성경을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 국경지대에서 통용되는 토속(土俗) 방언인 프로방스어(Provence; 로망어Romaunt Language)로 번역, 일반 대중이 쉽게 성경에 접근할 수 있도록 번역하고, 그 성경을 열심히 보급했다. 발도의 성경 번역은 당시 일반인에게 성경 읽는 것이 제도적으로 금지된 상황에서 행한 것이어서 그의 개혁에 대한 용기와 의지가 더욱 돋보이는 대목이다.
기 발덴시안의 성경 번역과 성경 공부 방식은 유대인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어쨌든발도는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뛰어난 사역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밀라노 주교였던 법률가 암브로스(Ambrosius),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콘스탄티노플의주교 크리소스톰(Chrisostom)과 같은 교부(敎父)들의 서적을 읽으면서, 성경에 부합한 내용만 참고하거나 이를 번역하여 보급함으로써 발덴시안들의 성경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갔다. 발도는 그와 함께한 신앙의 동지들과 성경을 읽고 공부 하면서, 다른 한편 1176년부터 발도는 성경을 들고 거리에 나가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면서 당대 사람들은 발도 지지자들을 가리켜 ‘발덴시안’(Waldenses, Waldensians; Waldensian Evangelical Church)이라고 불렀다. ‘발도파’라는 말은 로마천주교가 발덴시안을 박해하면서 그들을 비하 하는 뜻으로 쓰인 말로 알려지고 있다.
발덴시안의 주요 교의
발덴시안의 신앙고백서는 1120년(14개 항; ‘A Puritans Mind ’ 요5:39), 1544년(12 개 항), 1655년(23개 항) 등 세 차례에 걸쳐 수정되었다. 수정 때마다 발덴시안의 신앙고백서는 발덴시안이 경과한 역사적 상황들이 고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덴시안의 핵심 교의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과 의’, ‘그리스도의 신성’,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포함되며, 발덴시안의 이런 교의는 로마천주교의 비성경적인 유전과 전통 및 관습, 즉 ‘성수’(聖水), ‘사제복’(司祭服), ‘성인의 날’ 및 ‘성인의 유골’, 각종 ‘축제일’, ‘연옥’, ‘순례’, ‘교회절기’, ‘면죄부’(Purgatory)등이 모두 조작된 인본주의적 가식(假飾)이며 허위라는 것을 비판하는 기준이 되었다. 발덴시안의 주요한 교리는 다음과 같다.
신앙고백
발덴시안은 사도신경을 그들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였으며, 교황 권 부인과 이른바 ‘성인’(聖人)과 교통하는 의식을 비롯한 비성경적 의식을 반대한다.
성경관
기독교 역사상 혜성처럼 빛난 개혁적 삶을 살았던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발덴시안을 특징짓는 한 마디 말은 ‘성경을 사랑’ 했다는 말이다. 그들은 성경을 유일한 권위(sole authority)로 믿었으며, 성경은 신앙생활의 기초였다. 오직 성경만이 구원에 관련된 문제를 믿으며,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어떤 종교적 인준이 필요 없으며), 오직 성경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믿는다. 발덴시안은 성경이 인간 구원의 유일하고도 충분한 방법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새 언약 이외 로마천주교의 관습 대부분을 거부한다. 다만 성경 66권 중에서 신약을 유독 강조하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보자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다. ‘성인’(saints)이 중보자가 될 지혜는 없
연옥설
사람이 죽은 후 천국에 들어가기 전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있다는 ‘연옥’ 설(the doctrine of purgatory) 에 대하여는 그런 곳은 애당초부터 없었다고 보았다. 연옥설과 관련하여 죽은 자를 위한 ‘종부성사’의 기도 역시 반대했다. 다만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의(義)를 힘입어야 가능하며,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뿐인 이 두 가지 방법 이외의 제3, 제4의 방법은 없다고 믿었다.
교회관
발덴시안의 기본적 교회관은 로마천주교의 정통성과 그리스도의 교회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로마천주교의 제도적 권위(교황)까지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교회의 부(富)와 권리를 배격했다.
교회정의;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며, 로마천주교의 교회의 ‘성전화’(聖殿化, 聖堂)를 거부한다.
교회제도; 로마천주교의 교황 체제와 사제(司祭)주의 제도와 그들의 물질적 탐욕을 사악한 죄악으로 규정했다. 특히 교황이 교회와 정부 위에 군림하는 제도는 두 자루의 칼을 가진 것과 같은 것으로 보고 이를 거부했으며, 심지어 로마천주교를 말세에 예언된 바빌론, 그리고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고, 교황의 사죄와 용서를 거부했다.
교회직제; 발덴시안의 교회 직제는 동시대의 이원론과 영지주의의 성향을 띤 ‘카타리즘’(The Catharism, καθαρὀς)과 유사하다. 발덴시안은 로마천주교의 피라미드식 직급 ‘성직’(the clergy) 직제인 ‘평신도’(Lay people, The Laity)→신부→주교→대주교→추기경→교황과는 달리, 교회의 직제를 장로(목사)와 집사로 구분했으며, 다만 목사는 자비량해야 교회를 치리하며 감독할 수 있게 했다. 발덴시안은 베드로전서 2:9절에 근거하여 로마천주교의 ‘평신도’와 ‘성직’ 직제 구분을 반대한다(cf.딤2:14; 벧전1:1; 2:5).
교회의 거룩성; 발덴시안은 로마천주교의 비성경적, 미신적이고도 우상숭배적인 관습은 사람이 사람을 위한 ‘가시적 거룩’이라 보고, 인간이 세운 모든 전통을 전면 거부했다.
교회예전; 발덴시안은 로마천주교의 7성례를 거부하고, 두 가지 성례, 즉 세례와 상징적 의미의 성찬(the communion) 만 인정하며, 일 년에 두 차례 성찬을 갖는다. 발덴시안은 세례와 성찬을 온전한 교회의 의식으로 인정하고, 성찬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것으로 믿었다. 교회 예전은 목사가 집례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다만 유아 세례는 비성경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교회예배; 로마천주교의 이교적(異敎的)인 형식과 미신적이고도 우상숭배적인 미사의식을 거부하고, 오로지 “영과 진리로 예배”(요4:23)를 한다. ‘성자’의 화상(畵像), ‘성상’(聖像), ‘성물’(聖物), 십자가에 대한 숭배와 기도를 반대한다.
교회절기; 발덴시안은 주일을 성수하며, 로마천주교가 시행하고 있는 비성경적 교회절기(종려주일, 사순절 등)와 절일(節日)을 인정하지 않으며, 특히 제대(祭臺) 앞에서 허리를 굽혀 절하는 의식을 거부하고, ‘성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위령미사
모든 죽은 자를 위한 ‘위령미사’(Requiem, Mass for the dead)는 악한 것이므로 반드시 폐지되어야 하고, 동시에 맹세하는 것과 사형제를 반대했다.
물질관
청빈을 ‘영혼 구원의 조건’으로 적용한 것과 사유재산 반대(행2:44)는 정통 개혁 교회와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청빈과 가난은 그 의미와 적용이 차이가 있다.
생활모델
발덴시안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삶을 본받아 산상수훈을 윤리적 기초로 삼아 ‘시민서약’과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생활양식을 따라 사유재산과 잉여재산(剩餘財産)을 각각 거부하였으며, 자발적인 청빈(淸貧)과 빈자(貧者)의 삶을 지키면서 최소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 이외 어떤 물질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설교사명
발덴시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각기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어야 할 것을 권장하며, 부녀자들도 이 일에 헌신하게 하여 고위층 인사들에게 쉽게 전도로 접근하는 통로를 열어놓았다.
발덴시안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의 공동체 모임을 위한 어떤 건물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건물의 규모나 누추함과 화려함의 관계없이 그들을 위한 최소한의 건물 공간조차도 갖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교회당 건물은 물론 그 어떤 토지도 소유하지 않았으며, 세속 정치적 힘을 갖는 것조차도 거부했다. 발덴시안의 소유는 단순한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뿐이었다.
발덴시안의 루브롱 대학살
발덴시안은 사도들의 전통을 계승하여 설교를 통한 ‘복음 전파’를 공동체의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발덴시안은 ‘청빈과 단순한 삶’(in poverty and simplicity)의 실천을 통해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전해준 순수한 복음적 가르침과 삶에 헌신될 수 있다고 믿었다. 발도(Peter Waldo)의 청빈과 단순한 삶은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St. Francesco, 1181-1226)에 선행(先行)된 것이다. 남루한 옷에 샌들을신고 거리에 나선 발덴시안의 외모는 의심 없이 걸인 행색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입술에는 복음이 있었다. 초기의 발덴시안은 로마천주교 안에서 ‘평신도 순회 설교자 그룹’이었다. 그래서 ‘리용의 빈자’(Poor of Lyon)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179년 3월5일 발덴시안은 로마에서 열린, 제3차 라테란공의회(Third Lateran Council)에서 교황 알렉산던 3세(Alexander Ⅲ, c.1105-c.1181)로부터 청빈과 가난한 삶에 대한 서원을 승인받았다. 그러나 지역 사제의 동의 없이는 ‘평신도’가 설교하는 것을 승인할 수 없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발덴시안의 지도자 발도(Peter Waldo)와 그의 동료들은 정식으로 ‘성직자’(Clergy) 훈련을 받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발덴시안의 손에는 라틴어 성경을 대신한 다른 번역 성경이 들려져 있다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도는 거리에 나서서 계속 설교를 했고, 이에 리용의 대주교가 발도에게 설교를 중지할 것을 경고했다. 그 때 발도는 사도들이 산헤드린이 금지한 설교를 중지하지 않았던 것을 전감삼아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는 말을 인용하여 반박했다. 이 일은 결국 로마천주교가 발덴시안을 파문에 처하는 지경으로 몰고 갔다.
발덴시안은 그들의 신앙과 생활 교육을 지도할 수 있는 ‘바르바’(Barbas)를 두었다. 바르바는 신앙지도자로서 남녀 구별 없이 설교를 할 수 있었고, 일반 발덴시안을 상대로 ‘청빈’(Poverty)과 ‘개인의 책임’(Individualresponsibility), ‘자기부정’(Self-denial) 생활을 가르쳤으며, 그리고 개인의 성경 숙지 방법을 지도하기도 했다. 이런 기초를 탄탄히 다진 발덴시안은 신속하게 발전, 13세기에 지역적으로는 스페인, 프랑스 북부, 독일, 이탈리아 남부, 폴란드, 헝가리,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네덜란드 남서부를 포함하는 플랜더스까지 확장되었다.
그러나 로마천주교는 발덴시안의 발전을 좌시하지 않았다. 1180년-1230년 어간의 50년은 로마천주교가 이단 처리법 제정과 이단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보인 시기이기도 하다. 이 기간에 그 악명 높은 종교 제판소가 설치되었고, 도미니칸 수사들이 선발되어 제판소의 일을 맡았다.
발도와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비교한다면, 두 사람의 닮은꼴은 청빈과 단순한 삶, 그리고 어떤 외압에도 구애되지 않고 소신껏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으며, 다만 차이점은 프란체스코는 설교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강조되었다면, 발도는 그리스도의 교리를 강조한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침 발덴시안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로마천주교는 발덴시안이 로마천주교의 제도적 권위에 불복한다는 이유를 들어서, 1181년 리용의 대주교가 발덴시안에게 파문 처리하고, 그로부터 3년 후 교황이 발덴시안을 이단으로 규정, 이를 공식적으로 선포하게 되었다. 1184년 11월4일, 루치우스 3세(Pop Lucius Ⅲ, 1181-1185) 교황이 베로나 시노드(the Synod of Verona)에서 발덴시안과 그의 추종자들의 파문을 승인하고, 1215년 제4차 라테란공의회는 발덴시안의 교리를 저주하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300년 간 로마천주교의 발덴시안에 대한 박해가 이어졌고, 발덴시안은 수많은 학살과 처형, 종교재판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감내해야 했다. 1211년 로마천주교는 발덴시안 80여명의 화형을 비롯하여, 1393년에는 프랑스 그르노블(Grenoble)에서 발덴시안 150명이 화형에 처해졌다(askwhy-Christian Heresy). 박해의 칼끝이 좁혀지자 발덴시안은 한편으로는 지하운동을 전개하였고, 다른 한 편으로는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알프스 산맥 계곡의 은밀한 곳으로 이동하여 박해 상황에 대한 전열을 재정비해야 했다. 1230년대에 이르면서 로마천주교의 발덴시안에 대한 박해는 군사작전으로 진행되었다.
1231년 발덴시안은 이탈리아 토리노(Torino, Trier?) 산악지대로 피신, 47,500명 신자(감리교와 연합 공동체)룰 유지, 이탈리아 개신교 인구 725,000명 중 47,500명이 발덴시안으로 알려진 적도 있다. 그러나 이 통계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1487년 교황 인노첸시 8세(Pope InnocentⅧ, 1432-1492, 재위 1484-1492)는 십자군을 동원하여 발덴시안 소탕작전을 단행했다. 십자군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북부 국경지대 알프스 산맥 계곡에 은거(隱居) 중인 발덴시안 공동체 마을을 습격하여 발덴시안 몰이작전을 펼친 것이다. 1545년 프랑스는 발덴시안을 색출하여 남자 2,700명을 학살하고, 600여 명의 부녀자와 어린이는 노예로 처리했다. 1546년 4월에는 리용(Lyon)의 대주교와 투르농(Turnon)의 추기경이 파견한 군대가 프랑스 내에 있는 두 개 마을(Merindol and Cabrieres)과 28개의 작은 마을들을 공격했다. 공격받은 마을은 완전 파괴되었고, 약4,000명이 학살을 당했으며, 부녀자들은 여자로서 자존심 상하는 치욕을 겪기도 했다. 박해 과정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일부 발덴시안은 스위스의 제네바로 도망했고, 그곳에서 존 칼빈(John Calvin)을 만나 보호를 받기도 했다. 1540-1570년 이 30년 동안 로마천주교의 발덴시안에 대한 박해로 인하여 최소한 90만 명의 발덴시안이 살육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Secret History of Papal Rome)
발덴시안의 16세기 개혁운동에 합류
박해자들은 발덴시안을 ‘발도파’ 혹은 ‘발도운동’(The Waldensian Movement)이라고 불렀다. 전 유럽에서 개혁운동이 속속 전개될 때 발덴시안은 교회의 새로운 개혁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독일 신학자 외글람파디우스(Johannes Oeclampadius, 1482-1531), 슈트라스부르크의 개혁자 마르틴 부써(Martin Bucer, 1491-1551),그리고 ‘청교도의 선구자’ 윌리엄 파렐(William Farel, 1489-1565)과 협의하기 위해 베른(Berne), 바젤(Basel),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등지에 특사를 보내기도 했다. 후에 이들 개혁 신학자들은 1532년 10월12일 이탈리아 샹포랑(Chanforan)에서 열린 발덴시안 총회(the 1532 Waldensian Synod)에 참석하게 되었고, 이들 신학자들과 여러 차례 접촉한 결과는 발덴시안은 쯔윙글리와 부써의 신학노선을 따르기로 가닥을 잡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발덴시안 개혁은 약30년에 걸쳐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532년 샹포랑 총회는 발데시안의 이탈리아 반도에서 활동을 신장시킨 기폭제가 되어,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무대로 개혁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다.
맺는 글
폭염과 열대야가 지속되는 지독한 금년 더위 한가운데서 필자는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컴퓨터 자판기에 진한 소금물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가운데서도 중세기 개혁운동에 앞장섰던 개혁의 선구들을 찬찬히 더듬어 분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발덴시안의 개혁 역사의 자취를 다시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은 소득 중의 소득이었다고 생각된다. 개혁자들의 개혁 동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현저했으니, 곧 “하나님의 공의”(cf.창18:25; 사30:18)였다.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기 위하여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하였다. 개혁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기적 기득권을 버리지 않으면 결코 단행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교회 역사의 시대마다 빛난 개혁의 궤적을 남긴 개혁의 선구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기적 기득권과 제도적 논리와 관습적 공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일에 천하보다 귀한 목숨을 내어던졌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St. Francisco, 1182-1226),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 존 후스(John Huss, 1369-1415), 사보나롤라(Savonarola, 1452- 1498) 등 개혁의 선구자들은 자신의 시대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개혁을 위해 소중한 자신을 투신한 것이다. 존 후스는 1415년 7월6일, 화형장에서 성난 불길이 자신의 몸을 휘감을 때 찬송가를 세 번 불렀다고 한다. ‘그리스도, 당신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내게 자비를 베푸셨도다’(Christ, Thou living Son of God, have mercy upon me). 찬송 후 불길이 자신의 피부를 녹이고 핏줄을 말려갈 때도 마지막으로 주기도문을 세 번 했다고 한다.
개혁은 현실 안주와 자기부정과 이기심에서 헤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교회가 성경의 진리보다 이성에 통제된 학문과 관습적 논리에 갇힌다면, 사람들에게는 주목받을 지 모르지만, “영광스러운 교회”(엡5:27)로 다듬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삶이 따르지 않는 교리는 제도 유지를 위한 장치에 불과할 것이다. 딴은 한국 교회의 양적 정체성에 대하여 우려를 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무거운 마음으로 긴장해야 할 것은 교회의 개혁이 정체된 점이라 생각된다. 과문한 필자에게까지 교회 개혁의 정체가 심각한 상태로 알려지고 있다면 말이다. 교회가 본질을 잃은 채 무의식중에 ‘종교화’ 되어 가는 현상에 대하여 개탄하는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면, 과연 교회에 대한 신선한 기대를 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가 기업화 될 가능성은 그렇게 먼발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리는 소비자의 수요 충족을 무시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가 사람들의 충족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교회의 본질을 잃을 가능성은 적지 않다. 교회가 본질적 기능을 상실하면, 기업화 될 것이고, 기업화 된 교회 종사자들은 ‘노조’ 결성을 통한 법적 권리 보장을 사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교회는 노사정의 이해관계 조직이 아니라고 항변할 테지만 현실을 뛰어넘기에는 교회의 논리가 빈약한 현실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빛나게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것이 전도와 선교일 것이다. 궁전 같은 교회당과 눈부신 장식물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가린다면, 교회는 교회로서 소명 가치를 망각하는 우(愚)를 범하게 될 것이다. 사도행전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빛나게 한 시대였다고 생각된다.
발덴시안은 교회당 건물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발덴시안의 개혁과정에서 유아세례 거부와 무급 목사제도, 사유재산 부인, 정규 훈련 과정을 받지 않은 일반 교인들에게 설교를 허용하는 것 등은 정통 개혁 교회와는 괴리(乖離) 간극(間隙)의 약점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성경적 교의보다 윤리적 실천에 치부한 듯 하다는 역사적 평가를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천주교 천하에서 발덴시안의 성경 중심의 자기 부정적 개혁 용기와 실천은 이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여겨진다.
필자는 최근 코람데오닷컴 기사에서, 수도권의 한 노회가 소속 목사의 과오에 대한 강도 높은 징계를 결의하고, 이런 과오에 대하여 노회가 공동 책임을 느끼면서 함께 통회하였다는 내용에 신선함을 느낀 적이 있다. 교회 법적으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신선하게 느낀 것은, 현실 교회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아니 아주 드문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정체 가운데서도 개혁이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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