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기독교인과 가짜 기독교인
에쎌디
우리 선배들은 일제시대, 일제의 탄압이 두려워 일제에 저항하지 않고 명백한 우상숭배인 신사참배조차 타협하며 이 사회의 불의와 시대적 비극을 외면하고 교인수만 늘리면 하나님이 축복해주신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에도 독재와 폭압의 권력이 무서워, 이땅의 불의와 비극 앞에 눈을 감고 오직 교회일에만 열심을 내고, 개인축복만을 갈구하며 그런 번영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며 열심히 교회를 성장시켰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참담한 결과를 목도하고 있다. 그 결과로 한국 교회는 ‘진리의 빛도 잃어버리고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이땅에서 아무런 생명력도 없고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만신창이가 된 존재가 되어버렸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인가? 아님 이제라도 돌이켜 회개하며 우리가 잃어버린 ‘생명의 복음'을 되찾을 것인가?
진짜 기독교인과 가짜 기독교인
기독교인들에게 ‘생명'의 가치를 대체할만한 가치는 없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마치 국가나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며 개혁을 요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위로부터 허락한 절대주권을 흔드는 범죄인냥 생각하지만, 성경을 읽어보라. 하나님의 백성이 ‘생명'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선민의식에 젖어있던 이스라엘조차 멸망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철저히 파괴해 버리셨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땅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의 가치’에 도전하는 것은 그것이 어마어마한 돈이나 권력, 더 나아가 국가나 교회라 할지라도 용납할 수 없는 상대적 가치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교회 담임목사이기에 그가 성범죄와 횡령과 세습을 해도 아무런 비판도 할 수 없고, 국정 최고권력자이기에 어떤 불의와 폭압 앞에서도 침묵하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경건한 신앙'이 아니라 ‘우상숭배'에 불과하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외쳤던 예언자들을 핍박하고 학대하며 그들을 앞장 서서 죽인 자들은 기존의 부패한 교회, 기존의 부패한 국가, 기존의 부패한 왕권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던 거짓 종교지도자들과 정치가, 왕이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성경은 제대로 알아가기 시작하면 위험한 책이다. 참된 생명의 가치에 도전하는 것들에 대해 ‘저항'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항했던 '예언자적 기독교인'들을 통해 세상은 ‘생명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실현되어 왔다.
기독교인들의 시선은 항상 ‘생명'을 향해 있어야 한다. 그것도 가장 약하고 여리고 보호가 필요한 생명을 향해 예민하게 깨어있어야 한다. '생명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살아있다. 그것이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 아니던가? 사랑과 긍휼을 잃어버린 무심한 마음은 그가 구원의 은총을 받은 자인지 아닌지를 드러내는 분명한 증거가 될 것이다.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모습, 그것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자'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아닐까?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에 가장 고통받는 약자들을 향한 그의 태도가 결국 참된 기독교인과 가짜 기독교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은 사람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 부하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거라. 너희는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 집으로 맞아들이지 않았고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병들고 갇혔을 때 돌보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주님, 언제 우리가 주님이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갇히신 것을 보고 돌보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 왕은 그들에게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가 이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일이 곧 내게 하지 않은 일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는 곳에, 의로운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에 들어갈 것이다.” [마태복음 25:4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