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불교1 - 용어

스카이7 2019. 8. 10. 16:13


여래(如來 tathāgata) 이렇게 오신 분

실다운 진리에 수순하여 이 세상에 와서 진리를 보여주는 사람

 

아라한(阿羅漢 arhat) 마땅히 공양을 받을 만한 덕을 갖춘 사람. 더 닦을 것이 없다하여 무학(無學)

응당 공양을 받을 만한 응공(應供) 존경받을 만한 성자. 대승불교에서 소승의 성자. 부처님

나한(羅漢) : 아라한(阿羅漢)의 준말. arhat의 음사. 소승의 성자

 

(dharma)

담다-지각 대상들,달다-법률의 법,들다-존재하는 모든 것=들어 있는 것 듦

 

법문(法門 dharma-paryāya_ṁ) pary(둘레에)_ā(~)_ya(,,넣어)

흩어져 있는 사람이 모여 문으로 가는 것

 

saṁskṛta (싼스크리트)골라 담아진 언어,정련된 언어,인공언어,인위적인 언어,쌈빡한 언어

유위(有爲)-인위적: 무위(無爲)a()_saṁskṛta

sam(함께)_kṛ(끄르다)_ta(~,~어진,과수분):함께 끌르어 진:함께=인위적인

 

prākṛta (방언: 쁘라끄릿타)

널리 퍼져 있는 원래 언어 prākṛta 뿌리 언어,널리 퍼진(=풀어진) 언어,원시 언어,원래 언어

맨 앞에 만들어진,맨 처음 만들어진 것,본래의 것

saṁ()pra(뿌리,,,)

 

 

반야 prajnā(般若)쁘랒냐- 지혜

pra- ,,시작하는 근원,작용을 내는 출발점: ,뿌리,

jnā 희랍어 gno- 영어 know

 

sam-jnā(),(생각),싸ퟢ냐,J

금강경의 주요한 주제:어떻게 sam-jnā를 타파하는가

생각-그 유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나무를 고르기 위해 눈으로 보는 것

나무-형상, 나무를 본다-주관과 객관으로 나뉘어 본다, 골른다-전체와 부분을 분별

우선 대상()이 있어야 하고, 보는자와 보이는 것의 대()이 있다. 그 다음에 고른다는 것에서 전체와 부분이 생긴다. 그리고 그 곳에 의미 부여가 뒤따르게 된다. 현장은 으로 이 과정이 마음위에 이루진다고 본 것

모양은 제한적번역

 

반야바라밀다(prajnā-pāramitā쁘랒냐빠라미따)

pāra-강의 저편이나, 궁극적인 종착역. pā(,저편,바라,,나옴) 바라보다에서 보이는 저 편

피안(彼岸) 중생들의 미혹된 세계를 차안(此岸)데 대한 '깨달음의 세계'를 말함.

 

세존(世尊 bhagavat)

분배하다, 나누다우리말로는 받다, 받들다 bhaga-행운과 복을 나누어 주는 사람

존경스러운,존자(尊者), 혹은 세존 부처님은 세간을 이익케 하고 세상의 존경을 받으므로 이렇게 부름.

불은 깨달은 사람. 세존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스승이라는 뜻의 합성어.

 

비구 (bhikṣu 삐꾸, 比丘)걸식자

빌다 빌으샤 세존은 나눠주는 사람이고, 비구는 거꾸로 받는 사람

여성어미 ‘-ī’가 붙어 비구니 여승

 

열반 (nirvāṇa녈발, 涅槃)적멸(寂滅)

nir(잃다)_vā(바람)_ṇa(~) ->잃어 바람 되어나

잃다의 중세 고어에는 닗다. 일어서다, 떠나버리다, ()가 된다. 잃다,일어나다

우주가 불어나란 의미:브라만. 커피를 브루잉(brewing)한다의 ‘brewing’이 브라만과 같은 어원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불생불멸의 법을 체득한 경지. 절대적 편안. 깨달음의 경지.

 

보리(bodhi뵤뎨, 菩提)깨닫기, 능동적으로 깨닫는 행위

깨달음. (). 불타 정각의 지혜

 

부처(buddha, : 부톄)깨달은 자,붓다. 오늘날 부처.

 

아뇩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邈三菩提 ānuttarā samyak-saṁbuddhi)무상정등각無上正等正覺

ān()_ut()_tarā(더욱) samyak(완전히 계합하는)-saṁ(완전히 같은)_buddha(붇다)

위없이 바른 깨달음. 곧 부처님의 지혜

무상사(無上士) : Anuttara. 부처님은 세상에서 가장 높고 훌륭한 사람

 

sam- 보자기로 싸다 와 같은 쌈. 골라서 싸다라는 의미가 되면, 정련하다, 완전하다, 우리말로는 산듯하다, 쌈박하다. 모아서 싸다는 한 종류로 분류하다, 같은 것으로 하다가 되어, 영어로 same이나, 함께하다with가 된다. 우리말로는 싼

구부러진 것조차도 똑같다, 즉 딱 들어맞다, 계합하다

 

중생(sattva, 衆生)

생물,동물, satva(남성명사)로 중생들이 a있다 있는 것, 살은 것

 

보살(bodhisattva뵤살, 菩薩)부처+중생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 깨달음을 지향하는 사람. 부처가 되기 이전 단계의 사람을 말함.

 

마음 (manas, citta, ‘ㅁㆍㅿㆍㅁ’)생각하다, 추측하다의 명사형

ma- 측량하다의 의미로 맞추다의 마로서 영어의 matching(맞추기)와 그 어원을 공유

만들다(make), 맞춰보다(measure)

manas ㅿㆍㅁ->마음, 인지 가능한 의식, 7식인 마나식

 

citta 마음짓기 주의,사고,사상,목적,의지,정신,마음,지성,이성. cit을 중국은 마음()으로 번역

커튼을 치다,관찰하다, 인지하다, 지각하다, 응시한다. ~을 찾다

싫어하다, 미워하다, 이는 차이다이다. 애인한테 차이다, 차갑게 대한다 칫

 

수레(yāna, 수레)

15세기 우리말에 살아 가다가다녀다라고 썼다

걸어가다외의 가다는 모두 녀다를 사용하였다. 옛날에는 농사를 짓다녀름이라 하였고, ‘여름(summer)’농사를 짓는 철’, ‘열매가 열리는 계절여름이라고 볼 수 있다. 경상도 방언으로 자루에 물건을 넣어라할 때, ‘물건을 옇어라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말로 ‘yana’의 의미는 농사지음, 열매 맷음, 넣음, 이르름, 가는것

법문(法門) dharma-paryāyam 여기서 ya는 문(, gate)의 의미로 쓰인다. 즉 넣다가 된다. 열다/닫다할 때의 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의 문을 열다들어가게 하다라는 의미로 열다

 

보시(dāna, 布施, ‘뽀시’)다오, 의미는주다. 아낌없이 모든 것을 베품.

 

삼매(三昧) : samadhi의 음사.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혀 망념에서 벗어나는 것. 선정(禪定)에 드는 것.

선정(禪定) : dhyana. ()은 범어 dhyana의 음사이고, ()dhyana의 역어임.

좌선해서 마음을 통일하는 것.

 

육바라밀(六波羅蜜) : sad-paramita. 보살이 생사의 고해를 건너 열반에 이르기를 실천해야 할

여섯가지 덕목.

보시(布施) : 널리 베푸는 일

지계(持戒) : 계율을 지키는 일

인욕(忍辱) : 욕된 것을 참는 일

정진(精進) : 게으르지 않고 힘써 수행하는 일

선정(禪定) : 고요히 마음을 가라앉혀 일심이 되는 것

반야 : 참된 지혜를 얻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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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신, 보신, 화신

 

법신(dharma kāya 法身): kāya 스스로 능동적으로 만들은 것, 구조물(structure)

 

보신(sam_bhoga_kāya 報身): bhoga 부러지다 분질러진다 분질러 나누어 주다

 

화신(nirmāṇakāya 化身): Nir(=)_mā(측정하)_ṇ()_a()_kāya()

자성의 바다에서 파도가 일어나는 것과 같다는 표현입니다. 즉 개별 존재(bhāva)를 의미

근원적인 음/양의 분절을 통하고, 이를 통해 다양한 언어와 개념들을 만들어 내어 언어적 존재로 존재하는 것

스스로가 대상을 기술하기 위해 설정한 것입니다. 이런 언어적 존재는 실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언어적인 존재를 실재 존재하는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법신, 보신, 화신철학 개념 검토

 

법신, 보신, 화신이라 분류하는 것은, 우리들 인식의 분절체계를 지칭합니다. 예를들면, ‘시간과 공간법신(法身)’이라고 치면, ‘우주 전체에 걸쳐 펼쳐진 것보신(報身)’이 됩니다. 그리고 개별 개체화신(化身)’이 됩니다. 이를 일컬어, 천개의 강에 '(=법신)'이 비치어(=보신) 달 그림자(=화신)가 어리는 것으로 비유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개별 붓다의 출현은 바로 응신(應身)으로 볼 수가 있겠지요.

이런 3분절 구조를 우리들의 의식 구조에 적용해 보면, ‘법신보신이란, 비유하자면, 마치 투명한 거울’(법신)만상이 비추이는 것’(보신)을 뜻합니다. 화신은 개별적인 언어적인 분별로 인해 개체로 존재(bhāva)’합니다. 3가지는 동시에 존재합니다.

이때 (dharma)’존재(bhāva)’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현재 불교 용어는 어떻게 된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dharma)’으로, ‘존재(bhāva)’으로 같은 용어로 번역을 하여 버려서, 이 양자의 의미가 서로 믹스되어 있습니다. 남북조 시대의 구마라집도, 그리고 당나라때의 현장도 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용어를 으로 번역을 해 놔서, 이제는 무슨 의미인지 도통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존재(bhāva)’하는 곳에는 도 반드시 빛과 그림자처럼 존재하므로, 이를 서로 같은 ()’이라는 용어로 함께 번역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하면 아니 됩니다. 반드시 범어 원문을 참조하여, 그 양자의 분명한 의미를 가려야 합니다.

아무튼 법신, 보신, 화신이라는 것은 저 어디 멀리있는 그 무엇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바로 현금(現今)의 우리들 인식 상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효용성이 클 것입니다. 즉 이 3가지는 우리들의 의식과 언어로 동시에 이렇게 3가지로 벌어진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문제는 이 3가지의 분절에 있서, 언어는 원래는 응화신처럼, 그 작용함에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우리가 이를 잘못된 취함(upa_ā_dāṇa, )’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여, ‘언어적인 존재(bhāva)’에 갇혀 살아가게 됩니다. 이를 이름하여 중생이라 합니다. 그러나 본래부터 이런 언어의 감옥에 들어 간 적이 없기 때문에, 중생이란 것도 근본적으로는 성립이 되지 않지만, 언어적인 착각으로 인해 중생이라고 스스로 자임하여 여기기 때문에, ‘중생이라는 존재(bhāva)’가 있게 됩니다. 이렇게 언어로 여기는 것‘samjnā()’이라 합니다.

 

참고로, 이를 ‘samjnā’으로 한역으로 번역하고, 이를 현재 한국 불교에서는 모습이라고 번역하는 데, 이 역시 매우 잘못된 번역입니다. 당의 현장은 이 문제점을 인식하여 으로 번역하여, ‘생각이라 수정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다하지 못한 번역입니다. ‘samjnā’‘sam() jnā()’로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싼 생각입니다. 만약에 현장처럼 ‘samjnā’라면, 반야는 생각이 아닌, ‘이나 책상처럼 되어야 합니다. ‘생각이 아닌것은 ‘a_samjnā’, 안 싼 jnā’가 됩니다, 이는 ‘pra_jnā(반야)’와는 다릅니다. ‘pra_jnā’는 언어로 기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뭐라하기 어렵지만, 편의상 가짜의 이름으로 본래_jnā’라고 해 둡시다.

아무튼 이런 언어적인 착각과 오류을 바로 잡는 것이 바로 ‘prajnā(반야)’입니다.

참고로 이런 방식은 비단 불교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동일한 분절의 패러다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의미는 다릅니다만, 3분절하는 방식을 차용합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에서도 삼위일체라고 칭하는 이유도, 이리저리 다르게 말하지만, 결국은 이런 구조의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도교의 노자의 /의 대립에 따른 만물(bhāva)’의 존재함과 그리고 이를 로 통섭하여 ''이라고 지칭하나는 것 또한 바로 이런 구조의 산물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즉 이런 인식의 구조의 이해와 를 통해, ‘prajnā(반야)’가 중요하다는 점을 노자는 매우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그 의미가 큽니다.

 

이런 예를 드는 이유는 우리가 거창하게 종교를 논하기 이전에, 먼저 언어 구조를 한번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전연 다른 동서양의 사회에서, 비슷한 구조로 그 의미를 추정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언어의 근본 틀이 바로 이런 구조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비록 출발점은 다르더라도, 이같은 구조의 유사성에서 발생하는, 그 구조의 보편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종교에 관계없이 같은 패러다임이라는 것을 지시합니다.

 

아무튼 이런 방식의 삼신의 설명은, 보다 간명하게 우리들에게 이해시켜주기 때문에, 매우 소중하다고 하겠습니다.

 

돈황본 육조단경

 

선지식들은 들으라. 선지식들에게 말하여 선지식들로 하여금 자기의 색신에 있는 자기의 법성이 세 몸의 부처를 가졌음을 보게 하리라.

이 세 몸의 부처(=buddha)는 자성(=sva_bhāva)으로부터 생긴다. 어떤 것을 깨끗한 법신(=dharma- kaya) 부처라고 하는가? 선지식들아, 세상 사람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깨끗하여 만 가지 법이 자기의 성품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악한 일을 생각하면 곧 악을 행하고 모든 착한 일을 생각하면 문득 착한 행동을 닦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다 자성 속에 있어서 자성은 항상 깨끗함을 알라.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서 일월성신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지혜의 바람이 불어 구름과 안개를 다 걷어 버리면 삼라만상이 일시에 모두 나타나느니라.

 

세상 사람의 자성(=sva-bhāva)이 깨끗함도 맑은 하늘과 같아서, ()는 해와 같고 지()는 달과 같다. 지혜는 항상 밝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념의 뜬구름이 덮여 자성이 밝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참법(眞法)을 열어 주어 미망을 불어 물리쳐 버리면 안팎이 사무쳐 밝아 자기의 성품 가운데 만법(=sarva-dharma)이 다 나타나나니, 모든 법에 자재한 성품을 청정법신(=dharma-kāya)이라 이름하느니라. 스스로 돌아가 의지함이란, 착하지 못한 행동을 없애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하여 돌아가 의지함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천백억화신불 이라고 하는가? ‘사량(思量)’하지 않으면 자성(=sva-bhāva)은 곧 비어 고요하지만, ‘사량(思量)’하면 이는 곧 스스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악한 법을 사량(思量)’하면 변화하여 지옥이 되고, 착한 법을 사량(思量)’하면 변화하여 천당이 되고, 독과 해침은 변화하여 축생이 되고, 자비는 변화하여 보살이 되며, 지혜는 변화하여 윗세계가 되고, 우치함은 변화하여 아랫나라가 된다. 이같이 자성의 변화가 매우 많거늘,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보지를 못한다. ‘한 생각(一念,smṛti)’이 착하면(=samyag) ‘지혜(=pra_jnā)’가 곧 생기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자성(=sva-bhāva)’화신(=nirmāṇa-kāya)’이라하니라.

 

어떤 것을 원만한 보신불(=sam_bhoga_kāya buddha) 이라고 하는가?

 

한 등불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가 능히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애나니,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만을 생각()하라. 항상 後念착한 것(=saṃyag)’을 이름하여 보신이라고 하느니라.

 

한 생각의 악한 과보는 천년의 착함을 물리쳐 그치게 하고, 한 생각의 착한 과보는 천년의 악을 물리쳐 없애나니,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後念이 착함을 보신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번뇌가 도리어 보리가 됨)

 

법신을 좇아 생각함이 곧 화신이요, 순간순간의 생각()’마다 착한 것(=saṃyag)’이 곧 보신이요, 스스로 깨쳐 스스로 닦음이 곧 돌아가 의지하는 것이다. 가죽과 살은 색신이며 집으로 귀의할 곳이 아니다. 다만 세 몸을 깨치면 큰 뜻을 아느니라.

 

-내외명철(內外明徹)에 대해 성철 스님의 주석

 

내외명철(內外明徹 안팎이 사무쳐 밝음)은 묘각(妙覺)이니 불교의 구경(究竟)이다. ‘시방세계 및 몸과 마음이 깨끗한 유리처럼, 내외명철은 식음(識陰)이 다하였다고 이름하나니, 부처님의 묘장엄해에 들어가 보리를 원만케 하니라.

깨끗한 유리 속에 밝은 달을 담은 것 같으면 문득 지위를 초월하여 과해(果海)에 들어가 무소득에 돌아가나니, 바야흐로 구경극칙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만약에 식음이 다하면 바아흐로 지위를 넘어 얻는 바가 없이 구경을 원만성취하여 깨끗한 유리에 보배달을 담음과 같으니라.’

수정영락은 안팎이 사무쳐 밝아서 묘각에 항상 머무나니, 일체지혜의 지위라고 이름하느니라

 

*육조스님은 내외명철을 청정법신이라고 하였다. 이는 불교의 구경인 원교불상(圓敎佛相 원교의 부처님 모습)이다.

묘각의 지위에 들어가서 청정법신을 성취하니, 원교불상이니라

*조사스님의 말씀을 구차하게 교리에 배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육조스님이 강조하신 내외명철은 불교의 구경극칙인 원교묘각(圓敎妙覺)이다. 육조스님은 내외명철이라야 식심견성(識心見性 마음을 알아 성품을 봄)이라고 하였으니, 종문의 표방(標榜)인 견성(見性)은 불교의 구경묘각 즉 성불(究竟妙覺卽成佛)임이 분명하다.

 

- 돈오입도 요문론의 삼신사지(三身四智)” 견해

 

팔식을 굴려서 네 가지 지혜를 이루며 네 가지 지혜를 묶어서 삼신(三身)을 이룬다 하니, 몇 개의 식이 한 지혜를 함께 이루며, 몇 개의 식이 한 지혜를 홀로 이루는 것입니까?”

 

....몸의 이 다섯 식이 함께 성소작지(成所作智)를 이루고, 제육식은 의식이니 홀로 묘관찰지(妙觀察智)를 이루고, 제칠심식은 홀로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이루며, 제팔함장식은 홀로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이루느니라.”

 

이 네 가지 지혜는 각각 다른 것입니까, 같은 것입니까?”

 

본체는 같으나 이름이 다르니라.”

 

본체가 이미 같을진댄 어째서 이름이 다르며, 이미 일을 따라 이름을 세울진댄 바로 하나의 본체일 때 어떤 것이 대원경지입니까?”

 

담연히 공적하여 둥글고 밝아 움직이지 아니함이 곧 대원경지요, 능히 모든 육진에 대하여 사랑함과 미움을 일으키지 않음이 곧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니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 곧 평등성지요, 능히 모든 육근의 경계에 들어가 잘 분별하되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자재를 얻음이 곧 묘관찰지요, 능히 모든 육근으로 하여금 일을 따라서 응용하여 모두 정수(正受)에 들어가서 두 가지 모양이 없음이 곧 성소작지니라.”

 

네 가지 지혜四智를 묶어서 세 가지 몸三身을 이룬다 함은 몇 개의 지혜가 함께 한 몸을 이루며 몇 개의 지혜가 홀로 한 몸을 이룹니까?”

 

대원경지(大圓鏡智)는 홀로 '법신(法身,‘dharma kāya’)'을 이루고, 평등성지(平等性智)는 홀로 '보신 (報身,

sam_bhoga_kāya)'을 이루며 묘관찰지(妙觀察智)와 성소작지(成所作智)는 함께 '화신(化身, nirmāṇa kāya)'을 이루니, 이 세 가지 몸도 또한 거짓으로 이름을 세워 분별하여 다만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한 것이니라. 만약 이 이치를 확실히 알면 또한 삼신의 응용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본체의 성품은 모양이 없어서 머물음이 없는 근본을 좇아서 서니 또한 머물음이 없는 근본도 없느니라.”